들끓는 분노 해소될 수 있지만
美선 범죄 재범률 상승 역효과
형량 높이고 피해자 보호 우선
2025년 4월 15일,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서 80대 노인 두 명, 50대 여성 한 명, 20대 여성 한 명과 10대 여성 한 명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시신들에는 목 졸린 흔적이 있었고 현장에는 수면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숨졌는데 이들의 아들, 남편, 아버지인 50대 남성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누나에게 ‘가족이 집단 자살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내가 범행을 저질렀으니 나도 죽겠다’는 메모를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경찰은 범인 이씨를 광주의 한 빌라에서 체포했는데, 이씨는 사업에 실패해 수억원의 빚을 졌는데 그 채무를 가족들에게 떠넘기기 싫어 같이 죽으려고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혼이나 파산 등 가족을 보호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굳이 모두를 살해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씨가 현재 수사 중인 민간 임대 아파트 대규모 분양사기 사건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씨는 엄청난 공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살인 및 존속살해 혐의로 구속된 이씨에 대하여 담당 경찰서는 신상 공개 불가 방침을 결정했는데, 이 결정으로 인해 인터넷이 다시 한 번 들끓고 있습니다. 당장 공개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밀양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을 유튜브에 공개한 인터넷 방송인의 실형 선고 소식이 함께 전해지면서, ‘가해자의 인권만 보호하는 나라’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피의자 신상 공개’는 2024년 1월 25일부터 시행된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정중대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에 대해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의 동의를 거쳐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흉악범죄를 사회적으로 용인하지 않는다는 경종을 울리자는 차원에서 제정된 이 제도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우리나라에서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수사 중인 피의자에 대한 불이익을 명시적으로 허용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파격적인 입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범행의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서,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오로지 공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 한하여 피의자의 얼굴과 성명, 나이를 공개할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도 피의자가 미성년자라면 공개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공개 여부를 결정할 때 범행의 정황, 피해자 보호 필요성, 피해자 또는 피해자 유족의 의사, 피의자의 인권도 함께 고려하여야 합니다. 현재까지 이 제도로 수사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된 이들은 대전 초등학생 살인 사건의 범인 명재완, 화천군 북한강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양광준, 서현역 칼부림 사건의 범인 최원종, 정유정, 이영학 등 악명 높은 58명의 살인범과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 등 성범죄자 11명입니다.

이번 용인 일가족 살해 사건의 경우, ‘피해자 유족의 의사’ 부분 때문에 신상 비공개가 결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가족 살해 사건이므로 가해자의 가족이 곧 피해자의 가족인 유족이기도 합니다. 이씨의 얼굴과 실명이 드러날 경우 이씨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가족살해범 누구누구의 누나’, ‘가족살해범 누구누구의 조카’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유독 보수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이씨의 남겨진 가족이나 친척이 미래에 취직하려고 할 때,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할 때, 결혼을 하려고 할 때, 문제의 꼬리표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신상 비공개 결정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씨의 가족과 친척들이 겪고 있을 엄청난 고통을 덜어주진 못할망정 더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상공개제도의 본질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상 공개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흉악범죄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분노하는 대중에게 마음껏 욕하고 돌을 던질 대상을 주고 ‘사이다’를 맛보게 해주는 것일까요? 게시판에 달리는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이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댓글이 많이 달린다고 형량이 높아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파렴치한 피의자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면서 선처를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악범죄를 저지르면 이 나라에 발도 못 붙인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생길까요? 법무정책연구원 등 다수의 기관에서 행한 연구나 통계는 신상 공개는 범죄 예방 또는 재발 방지와 유의미한 연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성범죄자 신상 공개가 재범률을 높였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신상 공개로 인하여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범죄자들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사회 복귀를 포기하고 범죄의 길로 더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행 신상 공개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날이 갈수록 흉악해지는 범죄에 무서워서 못 살겠다는 국민을 입 다물게 하려는 임시방편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하나는 흉악범을 사회로부터 더욱 영구적으로, 확실하게 격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력범죄 평균 선고형은 조금씩 올라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국민의 법 감정에 비추어 볼 때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석방 기준을 대폭 상향하거나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는 것도 서둘러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보호입니다. 피의자 신상만 공개해 놓고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한다면, 나중에 형을 살고 나온 가해자가 오히려 더 악에 받쳐 피해자를 괴롭히고 보복하려 들 수 있습니다. 현재 검찰청에만 맡겨져 있는 범죄 피해자 보호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을 신설하고, 예산을 증액하고, 수사나 공판이 끝난 이후에도 개명, 거주지 이전, 주민등록번호 변경 등을 언제고 필요한 때 무상으로 신속하게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답답한 이 사회에 한 방울이나마 진짜 ‘사이다’를 선사하는 길일 것입니다.
서아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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