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의미를 덧붙여 많은 이들에게 전한다. 간혹 이 일이 고약해질 때가 있다. 일부 정치인의 막말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 말을 어떤 맥락에서 쓴 건지, 그 말에 무슨 의미를 담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을 전해야 할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모양이다. 그러니 말로 사달이 난다. 당 지도부일수록 자주 설화를 일으킨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 결속을 이끌어내 더 큰 권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눠야 선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탓일 게다.
막말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상대편 정당이나 당 지도부를 향해 ‘도둑놈들’,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야당 대표는 현 정부를 ‘좌파 독재’, ‘좌파 폭정’으로 규정하고, 당 소속 의원은 한·미 정상 통화내용 유출에 대한 여권의 비난을 ‘공포정치와 압제’라고 비난한다. 막말 따라하기가 정치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다. ‘달창’이나 ‘한센병’이라는 민감한 표현까지 나온다. 당내 분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당에서는 최고위원이 대표에게 “나이가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고 했다가 사과하는 촌극을 벌였다. 개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막말 정치는 말을 대화가 아닌 선전·선동에 이용한다. 그 결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혐오감과 증오감을 증폭시킨다. 언론학자 박승관은 “‘입’은 열리되 ‘귀’는 닫힌 상태의 의견 체계”를 ‘군론(群論)’이라 부른다. “‘군론 사회’에서는 사회 체계 내부에 충만한 불신과 증오감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해 이익을 챙기는 ‘정치 계급’이 발호하기 시작한다. … 정치는 표 동원 전략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 집단적 세력과 우김질에 의존해 이기적 욕구를 관철하는 ‘떼법’이 창궐한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정치의 품격은 정치인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정치인의 막말은 입으로 옮기기조차 꺼려지는 수준이다. 상대편에 대한 증오와 혐오는 넘쳐나고 예의는 찾아볼 수 없다. 말을 칼 삼아 휘두르다보니 여야 간 대화와 소통은 실종됐고 협치는 언감생심이다. 장기 휴업 중인 국회는 언제 문을 다시 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정치인들은 당장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두고 선거 판세의 우위를 선점하려는 궁리만 한다는 의심이 든다. 그러니 총선 이후를 내다보는 식견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미래 비전이나 정치적 상상력은 눈곱만큼도 없는 이들에게 정치를 맡겨도 될지 국민들은 걱정이 앞선다. 이러니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 배운 탓이다.
정치학자 케네스 미노그는 저서 ‘정치란 무엇인가’에서 “정치는 대화이기 때문에 정치기술은 재치를 요하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남긴 명언으로 사람들 속에 기억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정적인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를 ‘양의 탈을 쓴 양’이라고 한 것은 촌철살인의 풍자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기억되려는가.
여시아문(如是我聞). 불교 경전들은 첫구절을 이 말로 시작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 제자들이 모여 그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함석헌은 ‘새 나라 꿈틀거림’에서 “종교는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이라며 “근대 사람은 듣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다. 들은 것 없이 말하려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다”라고 했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데 소홀하다. 말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작가 김훈은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말이 병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듣는 자가 있어야 말이 성립되는데, 악악대고 와글거릴 뿐 듣는 자는 없다”고 했다.
정치인들의 막말을 또렷이 기억에 담아두려 한다. ‘여시아문’을 앞세워 그들의 말을 짚어보고 정치 실종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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