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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선언문' 작성까지의 기록, 1945년 8월 14일

입력 : 2015-08-14 11:35:52 수정 : 2015-08-14 16: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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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국립공문서관에 보관중인 `패전 선언문`
일본의 '패전 선언문'이 늦어지면서 수천 명의 일본인이 연합군 폭격으로 사망한다.

당시 일본군내에는 천황을 제거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내 무산되었고, 일본 천황은 항전을 용납하지 않고 패전 선언문을 재가한다.

日 허핑턴포스트 기획총괄이사이자 前아사히신문 기자 요시노 타이치로(吉野 太一郎), 일본 문예춘추(1995년), 아사히신문 역사 다이쇼·쇼와전쟁(大正・昭和戦,1991) 참조 및 인용.

07시.
일본 육군성의 전범 아라오 오키가츠(荒尾 興功) 군사과장과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육군 장관, 우메츠 요시지로(梅津 美治郎) 참모 총장이 한자리에 모여 회담. 아라오 군사과장이 쿠데타에 동참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한다.

08시 40분.
일본 쇼화천황.
쇼와 일본 천황이 스즈키 타로(鈴木 貫太郎) 총리와 키도 고이치(木戸幸一) 내대신(内大臣)과 만나 '아침 어전회의' 개최에 동의.

10시.
일본군 전범 원수 나가노 오사미(永野 修身)는 천황에게 항전을 주장했다.
일본군 전범 원수 나가노 오사미(永野 修身), 스기야마 하지미(杉山元), 하타 슌로쿠(畑俊六)는 천황에게 항전을 주장. 하지만 천황은 전쟁 종결방침에 동의하도록 명령한다.

11시. 
갈근묘 사건(葛根廟 事件).일본인 피난민 약 2000명이 소련 전차부대에 습격당해 약 1000명 이상 사망했다.
만주일대 일본인 피난민 약 2000명이 소련 전차부대에 습격당해 약 1000명 이상 사망(갈근묘 사건·葛根廟 事件)

12시.
천황은 '최고 전범회의(전쟁지도 회의)' 및 어전회의에서 항복을 결정하고 직접 라디오에 패전 선언의 뜻을 내비침.

13시.
수상 관저 국무회의에서 패전 선언 방송시간과 천황 육성 녹음, 문안책정 등에 관한 논의가 이뤄짐. (20시까지)

14시 40분.
전범(육군성) 정상회의에서 '황군(일본군)은 천황의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육군방침을 결정.

▲ 패전 선언문 완성이 늦어져 연합군 공습이 이어졌고 일본인 희생자는 계속 증가한다.

20시 30분.
패전 선언문 완성. 천황의 재가를 받음.

21시.
라디오에서는 8월 15일 정오 중대 방송을 예고한다.

22시.
스즈키 칸타로(鈴木 貫太郎) 내각 총리.
패전 선언문에 일본 스즈키 칸타로(鈴木 貫太郎) 내각 각료가 서명.

23시.
사코미즈 히사츠네(迫水 久常) 내각 서기관.
연합군에 패전 선언문을 전달. 기자들은 이 사실을 발표하려 하지만 사코미즈 히사츠네(迫水 久常) 내각 서기관은 항전파 군인의 테러를 우려해 8월 15일 천황의 육성 방송이 끝난 정오쯤에 보도를 요청. 기자들도 이를 받아들여 보도하지 않는다.

자정부터 새벽.
일본 일본국립공문서관에 보관중인 `패전 선언문`
일본 황궁에서 패전 선언문 녹음이 2회 이뤄졌고 완료 후 황궁 금고에 보관.

▲ 당시 패전 선언문은 오후 6시로 예상했으나 '문안책정' 등의 이유로 연합군 측에 통보가 지연.
그에 연합군의 폭격은 계속 이어졌고 약 1만 8000발의 B-29등 폭탄이 일본 전역에 투하되어 약 300명의 일본인이 사망하게 된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사진= 일본 일본국립공문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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