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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김모(29)씨는 군 제대 후 약 5년간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올해를 끝으로 그만뒀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도 행정대학원에 적을 둔 채 열심히 고시에 매달렸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올해 하반기 대기업 입사로 목표를 바꾼 김씨는 지난 여름부터 취업 스터디와 어학 점수를 따며 노력했다. 그러나 대기업 인사담당자 근무하고 있는 선배의 말을 듣고 본격적인 취업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도 낙담했다. 김씨는 “선배가 말하기를 요즘 대기업들이 가장 중시하는 스펙 중 하나가 대학교 학부 ‘졸업 시점’이라고 하더라. 근데 나는 고시를 위해 도피성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나처럼 고시를 오래 준비한 이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채용 풍토 아닌가”라며 한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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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송모(27)씨는 지난 1학기를 끝으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채웠다. 지난 8월 ‘코스모스 졸업’이 가능했지만, 송씨는 졸업을 미루기로 했다. 이유는 졸업생 신분보다는 졸업예정자인 게 취업 시장에서 더 유리할 것 같아서다. 송씨는 “학점을 높이기 위해 재수강을 했기 때문에 9학기 만에 졸업학점을 채웠다”면서 “이번 2학기에는 C+로 남아있는 2과목 재수강과 1학점짜리 운동 수업을 하나 들을 생각이다. 다행히 초과학기 때 9학점 이내로 들을 경우 등록금이 100만원대로 저렴한 편이다. 100만원 넘는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졸업예정자 신분이 취업에만 유리하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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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점 다음으로 졸업평점(16.2점)과 전공(14.7점), 출신학교(14.5점)가 그 뒤를 이었다. 취준생들이 열심히 쌓고 있는 스펙인 어학능력(10.3점)과 전공·직무 관련 자격증(9.5점), 해외취업·어학연수(6.0점)은 그리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학부 졸업 3년 이내와 3.0 이상의 졸업 평점, 서울 소재 대학 혹은 지방 국립대라는 스펙은 갖춰야 서류전형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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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들은 이러한 채용 풍토에 불만이 높다. 취준생 이모(28)씨는 “부모님께 손을 벌려 어학 연수를 다녀오고 자격증이나 어학점수 등의 스펙을 쌓으나 청춘을 바치는 게 우리 취준생들이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취준생들은 스펙 쌓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최종학교 졸업시점이 더 중요하다니 허탈하다”고 말했다. 취준생 조모(27)씨도 “안 그래도 흙수저들이 자기 힘만으로 졸업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같은데, 칼자루를 쥔 기업들이 이런 채용 풍토를 가지고 있으니 청년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을 보려는 것 아닌가. 나 역시 이번 공채 시즌에 취업하지 못하면 9급 공무원을 준비해볼까 생각중이다”라고 답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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