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도 동작 물 흐르듯 소화
섬세한 표현력 단연 돋보여
15년 전 파트너로 만나 인연
국내외 공연 1000여회 호흡
“이제 2세 계획 전념할래요” 힘겹게, 힘겹게 타티아나가 옛 짝사랑을 뿌리친다. 15년 만에 재회한 오네긴이 눈앞에 있다.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으려는데, 오네긴이 연거푸 매달리듯 구애한다. 냉정히 외면하지만 쉽지 않다. 그를 돌아보기만 해도 감정이 밀려든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이 있는 몸. 타티아나가 단호히 오른팔을 뻗는다. “나가세요.” 이내 무너질 듯 울먹이던 여자가 거듭 말한다. “나가세요.”
오네긴이 떠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타티아나가 깊은 오열을 토해낸다. 타티아나가 몸을 떨며 우는 사이로 막이 내리자, 숨죽였던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진다. 지난 주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발레 ‘오네긴’ 무대다. 유니버설발레단(UBC) 황혜민(39)·엄재용(38) 부부가 함께 선보인 마지막 공연이기도 했다. 앞서 두 사람은 ‘오네긴’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객석에서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박수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황혜민·엄재용 부부는 ‘오네긴’을 일찌감치 은퇴작으로 꼽아왔다. 존 크랑코가 안무한 드라마 발레의 명작인 ‘오네긴’은 기술뿐 아니라 표현력과 연륜이 더해져야 제대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가장 돋보인 점도 이들의 섬세한 표현력이었다. 마지막인 3막 ‘회한의 파드되’가 백미였다. 뒤늦게 타티아나를 사랑하게 된 오네긴과 결혼한 여자로서 이를 뿌리칠 수밖에 없는 타티아나의 회한과 슬픔이 동작 하나하나에서 전해졌다. 두 사람은 다양한 리프팅으로 구성된 고난도 발레 동작을 물 흐르듯 소화하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동작의 기술적 어려움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게 하는 안무 소화력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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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민·엄재용 부부가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드라마 발레의 명작인 ‘오네긴’으로 고별 무대를 갖고 있다. UBC 제공 |
두 사람은 오랜 세월 UBC 간판스타로 무대를 채웠다. ‘국내 첫 현역 수석무용수 부부’이자 단짝 파트너이기도 했다. 2000년(엄재용)과 2002년(황혜민) 입단한 이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2 파리 21세기 에뚜왈 갈라’에서 처음 파트너로 춤췄다. 전막 공연으로 첫 호흡을 맞춘 건 2004년 ‘라 바야데르’였다. 이후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지젤’ 등 UBC 모든 레퍼토리에서 주역 파트너로서 관객과 만났다. 이들이 파트너가 돼 주역을 맡은 전막 공연만 910여회, 국내외 갈라 공연까지 합하면 1000회가 넘는다.
두 사람은 지금 은퇴하는 이유에 대해 “원하는 만큼 했기에 후회 없을 것 같았고 좋은 기량을 보일 때 내려오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발레에 바친 이들에게 은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 24일 공연을 마친 황혜민은 “문훈숙 단장님이 제 얘기를 해서, 시작부터 약간 눈물이 났다”고 했다. 문 단장은 공연 전 해설에서 “춤이 삶 자체의 표현이었던 황혜민·엄재용 두 무용가가 땀과 열정으로 빚어낸 무대를 기억하며 사랑과 격려의 갈채를 보내달라”고 관객에게 당부했다.
황혜민은 “15년간 무대가 필름처럼 (눈앞에) 지나간다”며 “나의 존재를 있게 해준 마지막 무대를 마음껏 즐기려 했다”고 말했다. UBC를 떠난 황혜민은 당분간 휴식과 2세 계획에 전념할 예정이다. 엄재용은 안무·교육·공연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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