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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돼지 비명소리가…" 잊히지 않는 '살처분의 악몽' [이슈 속으로]

입력 : 2019-10-05 17:00:00 수정 : 2019-10-05 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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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방역인력들 트라우마 심각 / 살처분 방식 어떻게 달라졌나 / 10년전 구제역 때만 해도 가축 생매장 / 공무원들 외상후 스트레스… 극단 선택도 / 현재 한곳에 몰아 ‘가스 안락사’ 후 매몰 / 밀폐 제대로 안돼 상당수 산채로 묻어 / 작업자들 “죽음 보는 것 늘 고통” / 투입인력 거의 일용직… 절반 외국인들 / 방역교육·심리상담 치료 제대로 안돼 / 정부, 트라우마 예방 무료상담 진행키로 / 전문가들 “방역 인력분야 전문화 필요”

“자는데 어디선가 돼지비명이 들렸어요. 살처분은 가축도, 사람도 고통스럽죠.”

최근 경기도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살처분에 동원된 용업업체 직원 A씨는 가끔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살처분 현장에서의 끔찍한 기억들 때문이다. A씨에 따르면 해당 업체는 확진 농가의 돼지를 암롤박스(Arm-roll Box, 폐기물 적재함)트럭에 몰아넣고 가스를 주입한 다음 5분 뒤 집게차로 집어 통에 넣고 매장했다. 돼지 1300여두를 죽이는 데만 9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는 “(돼지를 죽이는)이산화탄소의 경우 코에 조금만 들어가도 아주 괴롭다”면서 “돼지가 비명을 지르고 일부 돼지는 일어서거나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데 죽지 않아 산 채로 묻어야 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등 수십년간 살처분을 경험한 축산직 공무원 B씨는 “늘 살처분 현장에 투입되지만 죽음을 보는 것은 매번 괴로울 수밖에 없다”며 “일단 전염병이 터지면 일로도 몸이 지치는데 눈에 보이는 살처분 현장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고 토로했다. 그는 술을 먹던 중 당시 장면이 떠올라 욕이 절로 튀어나와 가족들이 놀란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면 누군가는 살처분 현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날의 광경, 소리, 상황은 작업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10년간 살처분은 어떻게 달라졌나

2010년 구제역 당시만 해도 살처분은 가축을 산 채로 매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충격은 고스란히 작업자의 몫으로 돌아왔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가축 살처분 트라우마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0~2011년 구제역 당시 살처분 경험이 있는 공무원 및 공중방역 수의사를 대상으로 심리조사를 한 결과 76%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판정 기준을 넘겼다. 특히 2011년 구제역 매몰 작업에 참여했던 한 축협직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해당 직원이 업무상 재해를 당했다고 판결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살처분 방식은 동물보호법 제10조의 규정에 따라 동물을 안락사한 뒤 매몰하는 방법을 사용하도록 바뀌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은 ‘가스법’으로 이산화탄소를 사용해 가축을 죽인 뒤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보통 구덩이나 암롤박스에 돼지 50마리가량을 몰아넣고 비닐로 외부를 차단한 뒤 이산화탄소를 5분여간 주입해 죽인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살처분 역시 같은 방식이다. A씨는 “그런데도 살처분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돼지의 비명은 물론이고 아직 살아 있는 돼지를 묻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용역업체가 살처분에 동원하는 시간은 돈과 직결돼 서둘러 일을 처리해야 했다.

동물단체 ‘케어’와 ‘한국동물보호연합’은 지난달 24일 가스를 마시고도 살아 있는 돼지를 집게차로 집어 매립하는 살처분 현장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이원복 대표는 “직접 아프리카돼지열병 현장을 모니터링해보니 울타리 안으로 돼지를 몰아 비닐을 덮어서 가스를 주입하는데 밀폐 차단이 제대로 안 돼 상당수 돼지가 살아 있는 상태로 매립됐다”며 “돼지들이 이리저리 뛰어 혈액과 체액이 퍼졌고 전염병이 확산할 우려가 상당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ASF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용역업체 직원 C씨는 “사람이 하는 영역이다 보니 완벽할 수 없고 돼지 차이에 따라서 50마리 중에 4~5마리 정도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도 살처분 현장에 뛰어들어

ASF 확진 지역인 경기 파주, 연천, 김포, 인천 강화에선 지난 3일 오전 기준 73개 농가에서 돼지 10만1827두가 살처분됐다. 지난달 17일 경기도 파주에서 첫 ASF 확진판정이 난 이후 북부지역에서 확진이 잇따르고 있어 살처분 돼지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에는 살처분 작업에만 공무원 195명, 민간인 1373명이 투입됐고 인천 강화에는 공무원 211명, 민간인 902명이 투입됐다. 과거에는 살처분에 공무원, 군경이 대거 동원됐다면 현재는 용역업체 직원들이 현장 작업자로 투입되고 있다.

용역업체를 통해 살처분에 나선 이들은 상당수가 돈이 급한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한 용역업체 관계자는 “살처분 특성상 24시간에서 적게는 12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공사장보다 많은 시간 높은 시급을 받고 일할 수 있다”며 “고임금이다 보니 트라우마를 감안하고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 D씨는 “나라엔 재난이고 이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살처분 현장에)뛰어든다”며 “50명가량 노동자 중 절반은 외국인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지자체 무료상담 나섰지만… 전문가 “방역인력 전문화 필요”

하지만 살처분 참여자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뛰어든 일용직인 만큼 제대로 된 트라우마 예방교육이나 심리상담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살처분 참여 인력의 트라우마 예방을 위해 지자체별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17개소)와 정신건강복지센터(광역 17개소·기초 227개소)를 통해 무료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살처분 용역업체 관계자 E씨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방역, 소독에 대해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들이 없다”며 “가스 살처분이 완벽히 이뤄지기 힘들고 살아 있는 걸 죽이는 작업에 낯설 수밖에 없다”고 한숨 쉬었다. 한 지자체 방역 담당자는 “아프리카돼지열병 긴급행동지침(SOP)에 따라 살처분 참여자, 농가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 예방교육 및 전문기관을 통한 심리지원을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살처분 트라우마에 대해 일용직 노동자들의 인권, 산업안전 문제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주윤정 박사는 “사람이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심리적 외상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트라우마는 사후관리와 예방이 중요한데 매일 밥벌이에 급한 일용직 노동자, 특히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한 트라우마 치료가 제대로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주 박사는 “살처분에 동원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살처분 과정을 이해하고 위험에 대비할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전염병에 대한 위험은 반복되는 일인데 방역 인력 분야에도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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