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는 지난달 8일 가상자산위원회 논의 등을 거쳐 법인을 상대로 실명계좌 발급을 단계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가상자산에 대한 금융당국의 접근법이 전향적으로 변한 데 대해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법인 실명계좌 허용은 가상자산업계와 증권업계의 오랜 요구 사항 중 하나로, 만약 허용된다면 가상자산으로 비용을 결제하거나 신규 사업에 투자하는 등 다양한 사업기회가 열리게 된다.
다만 기대와 달리 지난 15일 위원회에선 해당 안건이 오르지 못했지만,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2일 월례 기자간담회에서 “법인계좌와 관련해 가상자산위 안건에서 내용이 제외돼 추진을 안 하는 것 아니냔 얘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긍정적 메시지를 다시 강조했었다.
가상자산 관련 법은 2021년 10월 당시 국민의힘 가상자산특별위원장이었던 윤창현 의원이 ‘가상자산산업기본법’ 제정안을 발의하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기존에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이 가상자산이 언급된 국내 유일 법률이었다.
당시 윤 의원은 “지원이나 규제 어느 하나에 편중되지 않고 관련 산업 발전을 위한 지원과 시장 건전성을 위한 규제가 조화를 이루도록 법안의 성격을 기본법으로 정했다”고 설명했었다.
또 2022년 8월에는 국민의힘 가상자산특별위원회가 디지털자산특별위로 확대 개편되며, ‘투자자 보호’와 ‘산업 진흥 도모’ 두 가지 목적을 부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2023년 6월30일 본회의를 통과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가상자산 이용자의 자산 보호, 가상자산 시장의 불공정 거래행위 규제, 가상자산 시장‧사업자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제재 권한을 담음으로써 사실상 ‘산업 촉진’보다 ‘규제’에 방점을 두게 됐다. 실제로 당국은 “이용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해왔다.
이 법은 지난해 7월19일 시행됐고, 약 4개월 후인 11월6일 금융위는 법안에 명시된 가상자산위를 법정 자문기구로 출범시켰다. 금융위는 전문성‧공정성‧중립성을 갖춘 민간 전문가를 선정해 법상 자격요건과 이해 상충 여부 등을 기준으로 위원을 선정했다고 했지만, 당초 기대를 모았던 가상자산업계 인사는 참여하지 못한 점에서 산업계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지 우려도 나왔다.
그동안 금융당국과 국회는 가상자산과 관련해 소비자 보호를 중심으로 논의 중이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전문가들은 ‘사업자-시장-이용자’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입을 모으고 있고, 특히 전통적 금융제도와의 융합문제도 지적했다. 나아가 가상자산 제도를 둘러싼 2단계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이에 금융위는 향후 관계기관 태스크포스(TF) 및 분과위원회를 꾸려 2단계 입법의 주요 과제를 선정하고 내용 검토에 착수한다는 입장이다. 검토 완료 후 가상자산위 논의를 거쳐 이르면 올해 하반기 중 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2단계 입법 시 ▲코인 발행 공시 의무 ▲코인에 대한 정의 ▲법인계좌 허용 등 1단계 입법에 담지 못한 내용을 담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 ▲가상자산 유형별 차등 규제 ▲암호자산서비스제공자(CASP) 규제 ▲시장 남용 방지 ▲내부통제 강화 등도 함께 논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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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미국 정책과 발맞추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취임 후 가상자산과 관련된 첫 번째 행정명령에서 ‘대통령 경제위원회 직속 가상자산 실무그룹’의 신설을 규정했고, 비트코인의 전략비축자산 지정을 예고했다. 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상대로 ‘디지털 화폐 정책’의 금지도 명령했다. 이는 한국은행을 비롯해 전 세계 중앙은행이 추진하던 방향과는 반대되는 입장으로, 우리 금융당국도 이러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비트코인의 국가 전략 준비자산으로서 비축 ▲대통령 자문위원회 신설 ▲미국의 암호화폐 수도화 ▲채굴업 지원 및 가상자산 규제 완화 ▲셀프커스터디(수탁) 권리 보호 ▲비트코인 투자세 폐지 등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금융당국은 지난해 6월 금융위 내에 디지털금융정책관과 가상자산과를 신설하며 향후 가상자산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기겠다고 밝혔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가상자산검사과는 사업자의 신고 수리·말소 등 등록과정 전반 및 위법행위 제재를 담당하고 있으며, 금융감독원은 가상자산감독국과 가상자산조사국을 통해 검사 시스템과 불공정 거래에 대한 시장 감시 및 조사를 맡고 있다. 전반적으로 아직은 산업에 대한 장려보다는 규제에 방점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보통 하루 단위로 바뀌는 금융시장에서 가상자산은 분 단위로 바꾸는 혁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유엔도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달성하는데 블록체인 기술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글로벌 흐름이 이러한 시기에 당국과 시장의 소통창구가 부족하다는 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변화하는 글로벌 시장 흐름에 맞게 국내 제도와 소통창구가 하루빨리 개선되길 기대한다.
김정훈 UN SDGs 협회 대표 unsdgs@gmail.com
*김 대표는 현재 한국거래소(KRX) 공익대표 사외이사, 금감원 금융투자부문 옴부즈만,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 선임협력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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