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보신주의 곳곳서 만연
제 역할 하도록 인사 숨통 틔워야
대통령실도 검증·승인 속도 내길
“도대체 활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중앙정부는 올해 예산을 최대한 조기 집행하라고 적극적인 행정을 주문했지만 ‘적당히 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모 공공기관의 간부는 며칠 전 통화하면서 이렇게 개탄했다. 생기 넘쳤던 그의 목소리는 체념한 듯 힘이 쏙 빠져 있었다. 이 기관은 전 정부에서 임명한 수장이 최근 임기를 마치고도 후임자가 없어 계속 업무를 보고 있다. 그간 역량이 부족한 기관장이 친분을 앞세워 주요 보직을 채우는 바람에 인사·부서 평가에서 잡음이 작지 않았는데, 임기 만료 이후 불만과 갈등이 더 크게 번졌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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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소연한 그 간부는 “탄핵 정국에 조기 대선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연말에야 기관장이 바뀔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며 “일부 직원은 ‘올해도 제대로 평가받긴 글렀다’며 의욕을 잃었다”고 혀를 찼다. 윗선은 대권 향배에 한눈팔고 있다고 한다. 어수선한 시국을 맞아 이 기관만의 문제는 아닐 성싶다. 중앙정부까지 공직사회 곳곳이 복지부동에 빠졌다는 지적이 줄을 잇는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인 알리오에 따르면 전체 331개 기관 중 20곳은 지난 14일 기준 수장 없이 대행체제로 운영 중이다. 다른 43곳은 법정임기를 마친 기관장이 직을 유지하고 있다. 후임 인선이 기약 없이 미뤄진 곳도 수두룩하다. 강원랜드는 재작년 12월부터 대행체제에서 못 벗어나고 있고, 한국관광공사도 1년 넘게 사장이 공석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작년 상반기 기관장의 임기 만료로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가 꾸려져 공모를 진행하다가 지난 11일 ‘적정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중단됐다고 한다. 지난해 4월과 11월 각각 수장이 임기를 마친 한국부동산원과 기술보증기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달 사장 임기가 종료된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작년 11월 후임을 뽑기 위해 임추위를 꾸렸지만, 진척이 없다는 전언이다.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수장을 겸직한 이재연 원장은 지난 1월 초 임기가 끝났으나 임추위 구성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혹자는 정권 교체까지 점쳐지는 과도기인 만큼 공공기관장 후임 인사를 늦추는 게 낫다는 주장을 편다. 최근 임명된 공공기관 수장을 둘러싸고 불거진 ‘낙하산 논란’처럼 국정 혼란 가중은 피하자는 취지에서다. 일각에선 야당이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고위 공무원 승진인사에도 손대지 말라고 압박했다는 관측도 나오는데, 사실이라면 오만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다 내수 부진·수출 둔화의 직격탄까지 맞은 현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서둘러야 한다. 공공기관이 중앙정부와 손잡고 위기 해소에 앞장서도록 당장 인사 난맥상부터 숨통을 터줘야 할 것이다.
대행체제나 임기 만료 수장을 둔 공공기관에서는 위기를 돌파할 새 해법을 모색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눈치만 살피다가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보신주의 문화가 싹트기 쉽다. 새로운 리더십이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위기대응능력을 키워야 공공기관이 ‘안전판’이라는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한국공항공사는 지난해 12월 제주항공 여객기의 무안국제공항 참사 당시 4월부터 지속된 사장 부재가 지적됐다. 원자력발전 설계와 정비를 맡은 한전기술과 한전KPS 역시 작년 5월과 6월 기관장 임기 만료로 원전 수출이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도 있다. 이들 공기업에선 지난해 말 주주총회를 통해 신임 사장 선임 의결까지 마쳤으나 주무 부처 장관의 임명 제청 등 후속 절차는 감감소식이다. 작년 9월부터 사장이 공석인 한국광해광업공단에는 이달 국가자원안보특별법 시행에 따라 핵심자원을 비축해야 하는 중책이 맡겨졌다.
무엇보다 기관장 후보를 검증하고 최종 승인해야 할 대통령실부터 속도를 내야 한다. 각 부처도 정책 집행의 손발인 산하 공공기관의 업무추진 동력이 상실되지 않도록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격언대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시국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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