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부’ 캐릭터 열풍으로 진화
중국 콘텐츠 시장 개방 여부는
외교보다 체제 자신감에 달려
중국의 지식재산(IP)이 주목받고 있다. 게임 ‘검은신화: 오공’과 애니메이션 영화 ‘너자2’가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다.
이들은 모두 중국 고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콘텐츠다. 검은신화: 오공은 서유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액션 롤플레잉 게임으로, 고전적 세계관에 현대적 그래픽과 액션 설계를 결합해 게임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너자2는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로 잘 알려진 고대 신화 속 영웅신 너자(나타)의 이야기를 각색한 판타지 애니메이션 ‘너자, 악동의 탄생’의 후속작이다.

이 두 작품을 접했을 때까지만 해도 ‘중국이 그 많던 전통 IP를 이제야 좀 제대로 활용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유기, 봉신연의, 삼국지 등 수천 년에 걸친 중국의 역사와 신화는 콘텐츠 자산으로 따지면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풍부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방식으로 가공해내는 데에는 다소 미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공과 너자의 등장은 IP 강국 중국의 뒤늦은 개화처럼 보였다.
특히 우주 분야에서 중국은 고전 IP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왔다. 자국의 독자 우주정거장에는 ‘톈궁(天宮·하늘의 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달 탐사 프로젝트 ‘창어(嫦娥)’는 중국 신화 속 달에 사는 선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달 표면에서 토양을 채취한 무인 탐사 로봇 ‘위투(玉兎·옥토끼)’ 역시 창어처럼 달에 산다는 전설 속 토끼에서 따왔다. 달 탐사 착륙선 ‘췌차오(鵲橋·오작교)’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 나오는 까마귀 다리다. 이 밖에 화성 탐사 프로젝트 ‘톈원(天問)’은 초나라 시인 굴원의 장편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위성항법 시스템 ‘베이더우(北斗)’는 북두칠성을 뜻한다.
이처럼 중국은 인류 최초의 달 뒷면 착륙이라는 기술적 성과에 더해 우주와 신화를 연결하는 이름을 붙인 전략을 통해 ‘우주 굴기’의 이미지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 기술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힘까지 동원해 우주 공간을 서사화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중국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힘’을 잘 활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라부부’ 캐릭터 열풍은 생각을 바꾸게 했다. 전통에 기대지 않고 맨땅에서 만들어낸 완전 창작 IP가 빠른 시간 내에 전 세계 소비자에게 통한다는 사실은 중국 콘텐츠 생태계의 진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최근 한한령(한류 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개인적으로 중국이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시점은 자국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을 때라고 느낀다.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사실상 중단됐던 한류 콘텐츠 유입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았다. 드라마와 음반 등 대부분의 한류 콘텐츠는 중국에서 정식 허가를 받지 못한 채 불법 스트리밍이나 우회 유통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일부 한국 게임들이 정식 판호를 받기 시작했고, 한류 콘서트가 제한적으로 추진되는 등 조심스러운 해빙 기류가 읽힌다.
이 같은 흐름은 단순한 외교적 완화 신호가 아니라 중국 내부 콘텐츠 경쟁력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당국 입장에서는 내부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 외부 콘텐츠를 개방하는 것은 체제 안정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이제는 우리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이를 오히려 비교 우위를 과시하는 장으로 삼을 수 있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중국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IP 등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한류 콘텐츠를 제한적으로 개방해도 자국 시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다는 계산도 나오지 않을까.
특히 게임 산업의 경우 이런 흐름이 두드러진다. 한국 게임사들은 최근 들어 텐센트·넷이즈 등과의 협력을 전제로 재진입을 타진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우연이 아닌, 중국이 스스로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했음을 시사하는 신호일 수 있다.
결국 콘텐츠의 개방 여부는 외교보다 체제 자신감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중국이 한한령을 ‘풀어줄 것인가’가 아니라 ‘풀 자신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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