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의 엘리베이터에는 구겨진 얼굴들이 가득하다. 하나같이 고개를 들어 초조하게 숫자를 헤아리는데, 찌푸린 눈이나 꾹 다문 입술 같은 것들이 지문처럼 거울에 찍힌다. 나도 다르지 않은 얼굴로 머리칼이 들뜬 타인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서 있다. 보통은 그 구도 그대로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탄 뒤 환승역의 높다란 계단을 오른다. 불편한 얼굴과 엉성한 뒤통수로 가득한 하루의 시작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 때였다. 바로 앞의 남자가 옆 사람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아마도 다툼 끝에 엘리베이터를 탄 뒤 말을 참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풀려나자마자 2차전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누가 그딴 거 궁금하대?” 옆 사람은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내뱉고 가버렸다.

힘들다고 토로하는 사람에게 저토록 모진 답이 또 있을까.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저 대화가 계속될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슷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그것이 과연 대화일까?) 김애란 작가의 글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단편 소설 ‘좋은 이웃’에서 화자는 엘리베이터에 붙은 종이 한 장과 마주한다. 담배 냄새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우니 베란다나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문이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누군가 낙서처럼 휘갈긴 글자가 적혀 있다. “억울하면 비싼 아파트 살아라.”
고민도 배려도 없이 그저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것, 거기에는 타인의 고통과 나는 무관하다는 냉정함이 깔려 있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복합적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타인과 나는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심지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기 위해 앞서의 경우처럼 맥락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우리에게 똑같이 되돌아온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피로하고 위축되어 있는지 토로할 때에 내 앞의 누군가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 내지는 “너보다 내가 훨씬 힘들어”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고독해진다. 지독히 외롭고 소외된 채로,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는 고통 속에 매몰되어 버린다. 저 사람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 나는 저 사람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그렇게 마음속에 써넣는 순간 나와 마주한 사람 역시 똑같은 글귀를 마음에 새겨 넣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타인의 고통은 굴절되고 투영되어 나의 고통과 맞닿고야 만다. 타인이 고독한 세계에 고립된다면 나 역시 닫힌 문 앞에 서게 되는 필연적 관계, 긴밀한 순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고 한 번쯤 꿈꿔 보지 않았을까. 누군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고 묻는 순간을. 뭐가 그렇게 힘든지 말해봐, 도움이 될 순 없지만 들어줄 수는 있어, 라며 내게 귀 기울여주는 순간을.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은, 이해받고 있다는 시선 속에서 마음껏 울 수 있는 어떤 순간을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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