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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가득 찬 컵에서 흘러내린 물로 베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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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09 23:16:51 수정 : 2025-10-09 23: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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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낮을수록 베풂에 무리수
‘배려’가 아닌 ‘눈치’ 보기에 가까워
여유 없는 상태서 건넨 배려는 부담
자신의 상처부터 충분히 안아줘야

대학 시절,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밴 선배가 있었다. 사람 좋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그 선배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홍반장처럼 나타나서 자기 어깨를 내어주곤 했다. 모두가 그 선배를 사랑했다. 모두가 그 선배를 선망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 선배가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병을 앓고 휴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그 후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그때 받았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나 밝아 보였던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었다니. 그 누구보다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줬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상처는 충분히 안아주지 못하고 있었다니.

잊고 있던 그 선배가 다시 떠오른 건, 우연히 보게 된 ‘블랙독’이라는 드라마의 한 대사 때문이다. 기간제 교사의 성장담을 그린 드라마에서 학생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에겐 소홀한 주인공에게 선배 교사가 이런 조언을 건넨다. “그런 말 들어봤어? ‘가득 찬 컵에서 흘러내린 물로 베풀어라.’ 그러니까 자기부터 좀 챙기고 남은 여유로 베풀어도 돼.”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울림이 상당한 대사여서 듣자마자 따로 메모해 둔 대사인데 곱씹을수록 다른 의미로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처음에 나는 저 대사를 ‘자기 돌봄’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여유 없는 상황에서 나를 제치고 타인을 위하는 건, 사막에서 물을 억지로 끌어다 따라주는 것과도 같다. 잠시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실 ‘내가 나와 맺은 관계’일 텐데, 그건 나를 가장 소외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먼저 챙기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건 삶의 안전 수칙과도 같다. 비행기를 타면 듣게 되는 안전 수칙 중에도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때 옆 사람을 돕기 전에 자기부터 쓰라”는 게 있다. ‘산소’가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자기 마음을 먼저 충분히 돌아본 후에 베풀어야만, 번아웃이나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다.

누군가를 베푸는 행위가 타인을 위한 것인지, 내 마음이 편해지고자 하는 것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베풂에 무리수를 두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그건 ‘배려’가 아니라 ‘눈치’ 보기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눈치’와 ‘배려’의 차이에 대해 이런 이야길 한 적이 있다. 눈치를 보는 행위엔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이 깔려 있다면, 배려에는 “나는 상대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가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치가 나에게 결정권이 없는 것이라면, 배려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의미다. 나의 행동이 배려에서 기인한 것인지,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인지, 이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가득 찬 컵에서 흘러내린 물로 베푸는” 건 타인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으면 주변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럼, 무언가를 베풀어도 상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해석한 것들로 주게 된다. 여유 없는 상태에서 건넨 배려는 상대에게 부담을 안기기도 한다. 한쪽이 지나치게 헌신하는 인상을 주는 관계는 건강한 균형의 추가 깨어지기 쉽다.

최근 ‘블랙독’ 속 대사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해 준 이는 배우 김혜수다. “나는 잘해주고도 상처받은 적이 많아요. 그래서 알았어요. 마음을 줄 땐 상대의 그릇도 봐야 한다는 걸요.” 이는 단순히 자책하거나 상대를 탓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관계 맺기의 기준점이 다름을 인정하는 말이며, 흘러내린 물을 건강하게 나누는 방법에 대한 자기 성찰일 것이다. 그래야, 컵에 물이 다시 차오르리라는 걸 깨달은 자의 목소리라는 점에서도 밑줄을 긋게 된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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