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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사무라이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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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4-22 09:52:23 수정 : 2010-04-22 09: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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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망하고 칼로 흥하고… ‘軍國’은 생존코드 “세기말 폭력만화가 현실이었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199×년의 지구. 기존의 질서와 도덕은 모두 붕괴하고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 세상을 힘과 폭력으로 지배하려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준동하고, 그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가슴에 7개의 흉터를 지닌 ‘북두신권’ 권법의 계승자, ‘켄시로’가 권선징악의 길을 나선다.

◇모두 27권이 출간된 일본 만화책 ‘북두의 권’은 한국에서 ‘북두신권’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1983년, 주간 만화잡지 ‘소년 점프’에 소개된 이래 ‘소년 점프’의 판매 부수를 80만부나 끌어올린 ‘북두의 권’(北斗の 拳)은 일본 만화 사상 최초이자 세계 만화 사상 최초로 1억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그런 ‘북두의 권’은 또한 “너는 이미 죽어 있다”라는 명대사와 함께, 인체 절단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북두의 권’에서 그려낸 잔인한 세계가 단순히 만화적인 허구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난 1000년간 사무라이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일본의 역사가 기실, ‘북두의 권’의 실제 배경인 까닭에서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칼 사냥’을 실시한다. 쇠붙이를 지닌 자는 누구든 왕좌를 넘보던 120여년간의 혼란한 전국시대를 평정했기에 더 이상은 무기가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농민과 사원, 마을과 촌락들은 살아남기 위해 칼과 창, 활과 총포로 무장한 채 곳곳에서 광포하게 날뛰던 사무라이들과 대치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두 번째 ‘칼 사냥’을 실시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을 완파한 후 도쿠가와 중심의 천하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도쿠가와막부의 운이 다한 19세기 말. 이번에는 메이지유신을 앞세운 신정부가 다시 ‘폐도령(廢刀令)’을 실시한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지배계층인 사무라이의 특권의식을 박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더 이상 칼을 차지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은 할복 자살하거나 정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남은 자들은 목검이나 칼집만 차고 다님으로써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

◇TV 광고에서도 사무라이는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다. 한 감기약 광고에서는 두 검객이 대결을 펼치다 감기약을 먹지 않는 검객이 해가 질 무렵, 기침으로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상대방의 일격을 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칼은커녕 붓 단속조차 이뤄진 적이 없는 한반도와 달리,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칼 단속만 세 차례에 이를 정도로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나라. 그런 일본은 예로부터 칼로 흥하고 칼로 망해 온 ‘사무라이의 나라’다. 해서 칼로 상징되는 군국(軍國)문화는 일본인들의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생존 코드이자 지극히 자연스러운의 방식이었다.

붓과 종이에 기반하기보다 창과 칼에 의지하다 보니 법보다 주먹이 효율적인 통치수단으로 대접받은 것은 당연지사. 이 때문에 분쟁의 사적 해결을 금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가한 처벌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를 들어, 1592년에 관개용수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다가 치안령을 위반한 셋슈 마을 사람들의 비극은 지금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농부 83명이 물을 두고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처형되었다. 싸움을 금지하는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13세의 어린아이도 아버지 대신에 처형되었다.”

사무라이 역시 이러한 폭압에서 예외일 리 없었다. 17세기, 가가 지방의 영주 마에다 도시쓰네는 “다른 지역의 사무라이와 벌이는 싸움과 말다툼에 관해서는 시비에 관계없이 처형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가 최선이다. 비록 면목을 잃어도 그것이 치욕은 아니다…. 잘 인내하는 사람은 신뢰를 얻을 것이다”라는 포고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포고령이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칼질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사무라이들이었기에, 마냥 참기만 하는 이를 신뢰하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1700년, 오카야마에서 벌어졌던 일화는 그렇게 칼에 기댄 정치철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느 공휴일, 사무라이들이 성에 나왔다. 오기와라 마타로쿠로가 동료 이코마 겐바에 대해 ‘여러 가지 비난’을 쏟아냈다. 두 명은 이미 오랫동안 견원지간이었던 것이다. 겐바는 나중에 성에 나와 마타로쿠로가 자신을 험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인내’하여 성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락초역 ‘도쿄국제포럼’ 앞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에 일본도와 함께 손 보호용 검막이인 ‘쓰바’를 잔뜩 내놓은 모습. 지금도 벼룩시장에 나가 보면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골동품이 ‘쓰바’다.
사건은 본질적으로 사소한 일이었지만 공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마타로쿠로는 중상이라는 나쁜 품행을 범했다는 이유로 할복 자살을 명받았다. 겐바의 태도는 영주가 있는 역내에서 인내의 모범으로 칭찬받았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은 그에 대한 처벌이 지극히 가혹했다는 것이다. 당국은 그의 토지와 직위를 몰수했는데 판결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겐바로서도 마땅한 행동을 해야 했는데, 너무나 원만한 대응이기 때문에 젊은 영주를 시중드는 사무라이의 태도로서는 불충분하다. 동정이 가는 바이기는 하나 재산 몰수에 처한다…. 이 결정 이후, 다툼이 일어나면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라’고 법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사무라이의 나라’, 320∼321쪽)

해서, 모욕받은 자신들의 주군을 할복 자살에 이르게 한 정부 고위관리를 47명의 사무라이가 살해했을 때, 도쿠가와 정권은 양측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만 무려 3개월간의 법리 논쟁을 벌인다. 상사(上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최고 규범인 사무라이 사회에서 직속 상관을 위한 복수는 응징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할 수도 없는 딜레마였던 것이다. 물론 정부 고관을 살해한 47인의 사무라이는 할복 자살하라는 어명(御命)을 받고 모두 할복해 죽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붓의 나라 조선은 일본과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필화(筆禍)는 있되 검화(劍禍)는 있을 수도 없었던 나라였던 까닭에서다. 마찬가지로 검화는 있되 필화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던 나라 역시 일본이었다. 해서 소설가 김훈은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우륵에 대한 ‘현의 노래’와 이순신에 대한 ‘칼의 노래’를 썼지만 기실은 ‘붓의 노래’를 써야 했다는 것이 필자의 B급 견해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사무라이 이야기’의 마지막 편을 통해 현대 일본의 곳곳에 아직까지도 짙게 남아 있는 사무라이 문화의 흔적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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