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시대에 부끄러운 자화상
日은 보수도 나서 혐오제지 입법
우리도 외국 출신 차별 금지해야
A: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를 그만둬라. 너 같은 차별주의자는 필요 없다.
B: 내가 무슨 차별주의자냐. 한국인은 다 차별주의자겠네. 조센진은 비판하면 안 되냐.

A: 너 같은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로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말하라. 법률 위반자가 있으면, 그 특정 개인을 고발하라. ‘조센진은 (일본에서) 나가라’,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조센진은 반도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런 시답지 않은 말 마라. 민족, 국적을 엮어 평가하는 비열한 발언을 하지 마라.
2014년 10월 20일 일본 오사카 시청.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시장(A)과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 재특회(자이니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회장(B)이 혐한 시위를 놓고 미디어 앞에서 공개 일전을 벌였다. 양자 회담은 일본 특유의 격식 차린 경어, 존칭 없이 ‘너’라는 말이 50여 차례 난무하는 반말 설전이 이어지다 10분 만에 주먹다짐 직전 종료됐다. 극우 단체 재특회, 극우 정당 일본제일당 창립자 사쿠라이 마코토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조롱하는 전시회, 영상이 파문을 일으켜 낯설지 않은 문제적 인물이다. 그러면 하시모토 도루는 누구인가. 발언만 보면 진보 인사 같지만, 놀랍게도 우파 정당 일본유신회 대표를 맡았던 사람이다. 군국주의 상징인 기미가요 제창 의무화, 평화헌법 개정 등을 주장해 다수 한국인에겐 불편한 인물이다. 이런 인사도 헤이트 스피치엔 일격을 꺼리지 않는다. 행동주의 시민조직 카운터스(counters)가 주먹으로 혐한 시위대를 응징했다면, 그는 입으로 혼내준 것이다.
헤이트 스피치는 민족, 국적, 인종, 종교, 젠더 등에 기반해 특정 개인·집단을 차별, 배제, 배척, 공격하는 언동이다. 헤이트 스피치 문제에서 주로 피해자였던 한국인이 이젠 가해자가 되고 있다니 이것도 국력 신장인가. 최근 시위대 수백명이 서울 광진구 자양동 중국 식당가 ‘양꼬치 거리’에서 “짱개는 대한민국에서 꺼져라”고 외치며 혐중 행진을 했다. 관광명소 중구 명동의 중국대사관 앞에선 수시로 혐중 난동이 있어 내외국인이 볼썽사나운 장면을 지켜본다. 도쿄 코리아타운 신오쿠보나 주일 한국대사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본 극우의 혐한 시위를 주체와 대상만 바꿔 서울로 옮겨놓은 듯하다. 국격을 추락시키고 국익에도 맞지 않는 졸렬한 행위다. 다문화, 해외 인재 유치 시대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노골적 혐중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당위성을 강변하기 위해 중국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급확산했다. 문제는 일본과 달리 한국 정치인 중엔 이들의 경거망동을 준엄히 꾸짖는 용자(勇者)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 존엄성 존중과 자유, 평등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보수가 나서 혐중 정서를 증폭시키는 형국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군사시설 도촬, 서해 구조물 설치 등 간과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으로 대중 부정 인식이 높다. 그렇지만 법률이나 외교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혐오를 쏟아내고 부추기는 행태는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인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자 범죄적 행위다.
시민의 자각과 연대는 물론 적극적인 계도와 제재, 이를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 여기엔 정치인, 특히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법치를 지킨다는 보수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도 골수 보수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던 2016년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이 발효됐다. 벌칙 규정이 없어 실효성 논란이 있었으나 시행 자체로 역할을 한다는 평이다. 주목할 점은 법의 내용이다. 법률명이 ‘본국외(本邦外)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를 위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률’이다. 포괄적 대상이 아닌 사회적으로 시급한 재일 한국인 등 외국 출신자에 대한 차별 방지에 우선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에 광범위한 내용을 넣으려다 종교계 등의 반발로 번번이 좌절된 경험이 있는 정치권이 선이후난(先易後難·먼저 쉬운 것, 후에 어려운 것 해결)의 현실적 지혜를 발휘해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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