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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베네치아, 한국 단색화 매력에 빠지다

입력 : 2022-04-28 20:22:27 수정 : 2022-04-28 20: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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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서 한국 작가들 전시회

단색조 추상화 거두 박서보 그룹전
세계적 컬렉터 “아이 러브 단색화”

하종현 배압법·이건용 신체드로잉
독특한 실험미술 관람객 눈길 잡아

5·18 특별전 ‘꽃 핀 쪽으로’도 화제
전광영 한지작품의 아름다움 뽐내
론티 에버스. 아트뉴스 캡처

뷰티풀 아이솔레이션(Beutiful isolation)….”

‘아름다운 고독’쯤으로 해석되는 혼자말을 나직이 내뱉으며 연신 감탄하는 한 외국인 관람객이 있었다. 박서보의 단색화 작품 앞에 선 그는 세계적인 컬렉터(미술품 수집가) 론티 에버스(Lonti Ebers). 미국 비영리 예술기관 아만트 재단(Amant Foundation)을 설립했고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즉 모마(Moma)를 운영하는 이사회 멤버이기도 하다. 소장 미술품이 700여점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영국 아트뉴스 선정 ‘세계 200대 컬렉터’이자, 뉴욕 뉴뮤지엄 운영자를 지냈던 유력 인사다.

에버스와 조우(遭遇)한 건 제59회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시작된 지난 20일이었다. 장소는 베네치아 시내에 자리 잡은 퀘리니스탐팔리 재단.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 주최 그룹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베트남 작가 단 보가 기획하고 박서보, 노구치 이사무 작품이 나오는 ‘단 보, 노구치 이사무, 박서보’ 전시였다. 에버스는 비가 올 듯 쌀쌀한 베네치아 날씨에 맞서 단단히 무장하듯 외투 위에 허리띠를 꽉 조였고 검은 운동화, 검은 배낭 차림으로 마치 돌진하듯 전시장에 들어왔다. 조금 숨이 찬 목소리로 자신을 “컬렉터”라고 소개한 에버스는 “아이 러브 ‘단색화’(I love 단색화)”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단색화 작품을 여럿 소장하고 있다며 꽤 능숙한 발음으로 자신의 소장품 작가 “정-상-화, 하-종-현, 박-서-보”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줬다.

이어 한국 단색조 추상화 거두인 박서보의 ‘묘법’ 연작을 꼼꼼하게 둘러본 그는 전시장 내 작품 설명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전시를 샅샅이 훑으려 작정한 듯 단단히 채비한 그는 잠시 틈을 내준 한국인 기자들에게 “또 보자”며 인사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베네치아로 간 한국 아방가르드

세계 최고 권위의 격년제 미술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시작되면, 이탈리아 베네치아 섬은 비엔날레 공식 전시장 외에도 곳곳에서 전시가 열리며 섬 전체가 예술섬으로 변한다. 한국 미술 역시 세계 미술계 관계자들이 모여드는 베네치아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에버스가 전시를 보러 일찌감치 달려온 단색화 거장 박서보를 비롯해 광주비엔날레의 5·18 특별전, 하종현, 전광영, 이건용 작가의 개인전도 열려 한국 미술을 알렸다. 이 가운데 단색화 그룹이면서 동시에 1970년대 AG(아방가르드협회) 소속이기도 한 하종현과 이건용 전시가 베네치아 한복판에서 열리고 있는 모습은 K-아트의 대표브랜드인 단색화에 이어, 다가오는 ‘AG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했다.

하종현 개인전 전경.

◆하종현

하종현 개인전은 베비라콰 라 마사 재단과 국제갤러리, 티나킴 갤러리 협업으로 팔라제토 디토에서 열렸다. 이미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한 바 있는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큐레이팅을 맡았다.

하종현전은 그간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상당수 나와 시선을 집중시켰다. 배압법(마대 캔버스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앞면으로 밀어내 제작하는 방식) 작품 ‘접합’ 연작 외에도 ‘탄생’ 연작, ‘도시계획백서’ 등과 초기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덕에 하종현 작품세계와 일대기가 탄탄하게 조명됐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작품은 두꺼운 철사로 둘러쳐진 캔버스 ‘작품73’(1973). 그는 AG 활동 시절 신문지나 휴지, 철사 등을 모아 여러 실험적 시도를 한 바 있다. ‘작품73’은 당시 길거리에 흔히 널려 있었던 철사를 캔버스에 두르고 캔버스를 뒤집어 뒷면을 앞으로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이어 하종현의 상징인 접합 연작의 시초 격인 작품 ‘접합74-17’(1974)을 만나면 그가 거쳐온 과정이 정리된다. 배압법으로 뒷면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내면 표면에 밀려나온 물감이 작은 조각기둥처럼 변하기에 그의 평면 작품들은 ‘조각적’이라는 독특한 평가를 받는다. 전시를 보고 나면 하종현 특유의 독특한 세계가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김 큐레이터는 “배압법은 평면성을 탈피하려고 벌인 여러 실험적 시도 끝에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건용 개인전 전경.

◆이건용

AG 그룹은 해방과 전쟁, 분단을 겪은 이들이 척박한 한국 땅에서 일군 토착 전위미술 그룹이다. 이런 AG를 주도했던 또 다른 인물이 바로 한국 실험미술 거장 이건용이다.

이건용 개인전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전시장인 자르디니 공원 근처, 카페거리와 마주하는 명당 자리에서 열리고 있다.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한 팔라초 카보토에서 ‘이건용-신체드로잉(bodyscape)’전 오프닝 행사가 시작되자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전시장에 들고 나며 미술계 관계자 발길이 이어졌다.

‘보디스케이프’로도 불리는 이건용의 대표작 신체드로잉 연작은 어떤 대상이나 생각, 감정을 그리려던 화가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자신의 신체와 평면화면이 만나는 현상이 기록된 증거로서의 작품이다. 혁신적 그림으로 꼽힌다. 메를로 퐁티 현상학이 투영된 것으로도 분석된다. 신체의 가동 범위 내에서 나타나는 선을 기록한 것으로서 관념이 아닌 신체의 주체성을 담아낸 그림이자 신체를 통해 움직임의 논리를 담아내 ‘로지컬’한 작품으로도 꼽히는 등 풍부한 해설과 화두를 제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신체 드로잉 방식을 기초로 한층 성숙한 색감과 움직임을 담은 신작 약 20점을 선보였다. 이건용은 내년 하반기에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의 협업으로 이뤄질 한국실험미술전에 나설 예정이어서 이번 전시가 국제무대에 그를 각인시키는 예고편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전 ‘꽃 핀 쪽으로’ 전시장에서 최선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베네치아=김예진 기자

◆광주정신 꽃펴

한국 관련 또 다른 주목할 전시로는 광주비엔날레 전시를 빼놓을 수 없었다. 2020년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세계 순회 전시로 기획됐던 5·18 특별전이 코로나19로 1년 연기 끝에 베네치아에서 선보인 것. ‘꽃 핀 쪽으로’를 제목으로 열린 이번 전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국가관 운영이 중단되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베네치아에 특별 영상 메시지를 보낸 가운데 열려 의미가 남달랐다. 세계 곳곳에 민주와 평화가 여전히 절실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꽃 핀 쪽으로’ 전시는 국내외 작가들이 다수 참여한 전시지만, 5·18을 직접 배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주는 감동이 유독 진했다. 최선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물감을 한 번씩 ‘후’ 하고 불어달라 부탁해 사방으로 물감 자국이 뻗쳐 마치 희망의 나비를 형상화한 듯한 작품을 내놨다. 사진작가 노순택이 선보인 점점 빛바래가는 광주 희생자 영정사진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도 한지 작가 전광영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과 함께 ‘한지 하우스’를 열어 우리 종이의 아름다움과 작품의 조화로움을 뽐냈고 설치미술가 양혜규도 세계적 작가들과 그룹전을 펼치며 활약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코로나가 종식되면서 글로벌 미술 행사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고, 코로나 기간 단순히 이동이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적 시스템과 인식이 바뀐 상황”이라며 “미술은 전에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더욱 과감하게 발언할 것으로 보이고, 이번 비엔날레는 그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특히 코로나 기간 한국 미술시장의 전례없는 호응이 있었는데, 이것이 국내에서 그치지 않고 확장되려면 제대로 된 작가들의 글로벌 활약, 그에 걸맞은 평가가 필요하다”며 “미술한류는 한국 미술이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 미술계가 바라온 것이었으나 지금이야말로 결정적 시점”이라고 말했다.

‘단 보, 노구치 이사무, 박서보’전 11월 27일까지, ‘하종현’전 8월 24일까지, ‘이건용’전 7월3일까지, ‘전광영-재창조된 시간들’전은 11월 27일까지.


베네치아=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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