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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감정의 전쟁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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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10 23:46:48 수정 : 2025-04-11 00: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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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있다.

 

상대에게 시비를 건 뒤 ‘긁?’이라고 묻는다. ‘긁혔냐’는 뜻으로, 속되게 표현하면 ‘빡쳤냐’는 질문이다. ‘긁’의 파장은 크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긁혔다는 걸 인정하긴 싫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막긴 힘들다. 국어사전에선 ‘긁다’를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라고 정의한다. 뾰족한 건 날카롭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리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찔리면 상처가 남는다.

이예림 사회부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해 12월3일 오후 11시부터 탄핵이 결정된 4월4일 오전 11시까지 123일 동안 집회 현장을 취재했다. 진영을 막론하고 다수의 집회 현장에선 ‘긁는’ 발언과 행동이 빠지지 않았다. 진보 진영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향해 “어차피 탄핵될 건데 ××들”이라며 힐난했고, 보수 측에선 아예 ‘좌파 조롱단길 함께 걷기 대회’를 열었다.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찬탄, 반탄을 외치던 이들은 서로를 향한 조롱에 금방 얼굴이 상기되곤 했다. 온갖 곳이 긁혔다.

 

191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봄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행위로서의 전쟁이 끝난 대신 이젠 감정의 전쟁을 치르는 시대가 시작됐다. 둔감한 놈들은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테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거다.” 돌이켜보면, 지난 123일간 우리는 이 감정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서로를 긁었다.

 

‘봄눈’은 초기 다이쇼 시대의 이야기다.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서양의 영향을 경험하고 있던 때다. 불안정한 사회와 함께 개인의 정체성은 흔들렸다. 이런 혼란 속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감정적 우위를 점하려 애썼다.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랬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기댈 곳을 잃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붙잡는 것은 감정적 우위였다.

 

길어진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그랬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누가 더 옳은가’보다 ‘누가 더 감정적으로 우위에 있는가’가 중요해졌다. 상대방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타자화됐다. 서로를 ‘개념 없는 극우’와 ‘친북 좌파’로 규정하고 감정적으로 배제했다. 그럴수록 집회 현장에서 이성적인 구호는 듣기 힘들었다.

 

문제는 “행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전장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이 전사해 간다”는 점이다. 여기서 젊은이는 현재의 우리이자 미래의 세대를 의미한다.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가 그 단적인 예다. ‘봄눈’의 주인공 기요아키가 사토코를 향한 감정적 집착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듯, 감정의 전쟁은 결국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이성이라는 닻이다. 이성은 상대방을 ‘적’이 아닌 ‘다른 생각을 가진 이’로 보게 한다. 감정이 상대를 긁기 원할 때, 이성은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분한 이성의 목소리임을 명심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예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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