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시권은 법의관에게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검시권을 의학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망 원인을 밝히는 일 자체는 환자를 진단하는 것이니 당연히 의사 몫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의사 역할은 현재 경찰 요청에 응하는 참고인 또는 감정인 수준이다. 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조차 마찬가지다. 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의 몫이듯 검시는 의사가 하고 그 결과에 대한 법적 판단은 사법부가 할 일이라는 것이 법의학계 주장이다.
하지만 “검시는 사망의 원인이 범죄인지 밝히기 위한 절차로서 ‘내사’에 해당하는 사법행위”라는 것이 법조계의 입장이다. 의학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의사를 검시체계에 넣을 수 없으며 검시권을 의사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영미법 체계 국가처럼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 또 다른 수사기관으로서 법의관 또는 검시관을 법령에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형법체계 전반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수사당국은 이보다는 검시 전문인력, 즉 법의학자의 부족을 현행 검시체계의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지금도 초동수사 단계에서 의사들의 참여는 가능하지만, 법의학 지식을 갖춘 의사가 부족해 부검 단계에서야 법의학자가 개입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의학계는 설령 법의학자가 대거 쏟아져 나온다 해도 그들을 받아줄 현장이나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황인 만큼 제도 정비가 선행해야 인력 양성이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또 수사기관 개입은 법의학자가 시체를 살펴 타살이 의심된다고 판단한 후에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김장한 서울아산병
원 교수는 “시체를 살피는 것은 수사와 아무런 관계 없는 수사 전 단계”라며 “법의관이 검시권을 가질 경우 부검을 위해 시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는 것을 가지고 수사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상황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검 권한을 가진 법의관 제도를 만들게 되면 법의관은 병원 밖에서 사망해 검안해야 하는 모든 죽음을 총괄하게 된다. 범죄 연관성에만 초점을 맞춘 검시로 등한시됐던 행정검시도 가능해진다.
법의관 제도가 장기적으로 마련된다면 법의학자 숫자도 늘게 된다. 법의학 전문의 과정을 신설하고, 의과대학에 법의학교실 설치를 의무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국 의대에 법의학교실이 생기면 전국을 담당할 수 있는 법의관 200명 양성도 4∼5년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윤성 서울대 교수(법의학교실)는 “10년, 20년 뒤에 검시 전문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따져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검시체계의 모범답안을 작성하기 위해선 유럽회의(유럽 42개국 가입·유럽연합과는 다른 조직)에서 1999년 내놓은 ‘회원국의 법의검시규정 일치에 관한 각료위원회의 권고안’을 주목할 만하다. 권고안이 나온 지 15년이나 됐지만 후진적인 한국의 검시제도에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고안에서는 법의전문가나 법의학적 검사에 익숙한 의사가 검시를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다만 타살과 타살이 의심스러운 죽음은 반드시 법의전문가가 검시하도록 돼 있다. 또 ‘법의전문가는 어떠한 형태의 압력에도 굴복해서는 안 되고 직무를 수행하는 데 객관적이어야 하며, 특히 결과와 결론을 표현하는 데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법의학자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부검을 해야 하는 죽음은 10가지로 정해놨다. 타살과 타살이 의심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고문 또는 어떠한 형태의 학대를 의심할 수 있는 인권 침해, 직업병과 직장의 위해, 기술적 재해 또는 환경적 재해 등이 대상이다. 범죄로 인한 억울한 죽음뿐 아니라 재해로 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유럽회의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권고안은 부검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도 해놓았다. ‘부검은 가능한 한 한두 명의 의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며, 그중 최소 한 사람은 검시의학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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