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갑질에 시달리고 불법에 내몰리는 은행 경비원

입력 : 2016-04-06 19:42:58 수정 : 2016-04-06 20:22:48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지점 차량 세차·은행 서류 준비·비품 구입까지… 잡일 도맡아 하는 은행 경비원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A씨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 이후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A씨는 하루에 A4용지 한 박스 분량의 ISA 가입 서류 수천장을 준비하는 일을 한다. 고객이 서명하기 쉽도록 서명란에 형광펜 등으로 표시하는 일이다. 경비원의 업무와 무관한 일이지만 “좀 도와달라”는 지점 직원의 반강제성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렵다.

최근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가 직원에게 냉대를 받게 되면서 거절은 더욱 힘들어졌다. 직원은 ISA 가입에 필요한 세금 관련 서류 발급 위임장에 고객 대신 서명을 해달라고 A씨에게 부탁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받고 다른 서류는 은행원이 알아서 처리하는 ‘불법행위’에 A씨를 끌어들인 것이다. A씨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마음에 걸려 부탁을 거절한 뒤 직원의 싸늘한 시선에 시달리고 있다. A씨는 “경비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고 일을 시작했는데, 실제 하는 일은 잡부나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은행의 보안과 질서유지 등을 위해 고용된 은행 경비원들이 은행원들의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 경비원들은 자신의 신분으로는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는 불법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다.

6일 세계일보가 취재한 주요 시중은행 경비원 10여명은 “경비원은 은행원들을 위한 하인 또는 심부름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커피 등 지점 비품을 사는 일이나 화분에 물을 주는 일, 택배발송 등 온갖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지점 거래업체를 만날 때 같이 가서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하거나 신상품이 나왔을 때 사실상 강제로 가입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경비원들이 업무 도중 책임을 부당하게 떠안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경비원 B씨는 “지점장이 지점 차량 주차나 세차를 시키기도 한다”며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서 혹시 사고가 날 경우 경비원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비원은 은행 직원이 아니라 도급업체에서 고용된 직원이기 때문에 법인 차량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일부 지점에서는 자동화기기(ATM)에 돈을 채워넣는 일을 경비원에게 시키기도 하는데, 경비원은 ATM을 조작할 권한이 없다. B씨는 “경비원이 되고 나서 은행에 가서 교육을 받을 때 지점 차량 운전이나 돈을 만지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지점 상황은 달랐다”며 “은행원들도 경비원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있지만 관행처럼 일을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고객이 빼먹은 서명을 대신 하는 일도 경비원의 몫이다. 이는 금융실명제법 위반 사안이다. 경비원 C씨는 “CC(폐쇄회로)TV 사각지대에서 대필 서명을 한다”며 “서명이 빠진 부분이 있으면 고객에게 다시 받는 것이 원칙인데, 이렇게 하면 일처리가 늦어지니까 경비원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비원이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은행원들도 인정한다. 은행원 김모(33)씨는 “지점장이 경비원에게 건방져 보이니까 앉아 있지 말라고 해서 경비원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경비원들은 청원경찰법이 아닌 경비업법의 적용을 받는다. 은행은 경비 도급업체와 계약을 맺고 업체가 경비원을 고용한다. 6개 시중은행(신한·KB국민·우리·KEB하나·NH농협·IBK기업은행)에 확인한 결과 은행들은 경비업체와 계약을 맺을 때 경비원의 업무를 경비·고객응대 등으로 하고 있다고 답했다. 경비원 애로사항은 은행이 직접 받거나 업체를 통해 받아서 조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경비원들의 말은 달랐다. 경비원 D씨는 “한 달에 한 번 경비지도사가 지점에 오는데 은행 서무의 확인도장을 받고 5분도 안 돼 떠난다”며 “애로사항을 말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비업법을 보면 제7조5항에 ‘경비업자는 허가받은 경비업무 외의 업무에 경비원을 종사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돼 있고, 이를 어기면 경비업 허가가 취소될 수 있다. 경비업체는 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경비원 1인당 100만원에 가까운 돈을 떼간다. 은행에서 업체에 주는 경비원 월급은 한 달에 250만원 안팎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비원들이 업체에서 받는 돈은 신입 기준으로 월 120만∼150만원이다.

경비원 E씨는 “도급업체가 중간에 얼마를 떼가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 몇 년을 일해도 진급도 없고 상여금 등 복지는 꿈도 못 꾼다”며 “은행에서 일하니까 번듯해 보이지만 아르바이트만도 못하다”고 말했다.

오현태 기자 sht98@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혜리 '겨울 여신 등장'
  • 혜리 '겨울 여신 등장'
  • 권은비 '매력적인 손인사'
  • 강한나 '사랑스러운 미소'
  • 김성령 '오늘도 예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