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는 대구농고 시절 학교에 있던 벌통을 관리하면서 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 글쎄 3일 만에 벌 1통에서 꿀이 소주 대병으로 3병 나오더라고요. 조그마한 곤충이 그렇게 많은 꿀을 물고 온다는 게 이해가 안되잖아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때부터 벌에 미쳐 버린 겁니다.”
안씨는 학교 공부도 다 팽개치고 벌에 매달렸다. 벌 구경에 정신을 빼앗겨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바람에 수업에 늦어 매를 맞는가 하면 수업시간에도 ‘벌책’을 펴놓고 있다가 교사에게 책을 찢기기가 일쑤였다. 그때부터 안씨에게는 ‘벌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창생들이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벌쟁이라고 하면 다 알지요.”
안씨는 졸업하자마자 돈 200만원을 빌려 25개의 벌통을 샀다. 당시 14평짜리 대구 아파트 가격이 150만원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생사를 걸고 양봉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는 꿀이 달다고 하지요. 사실은 그게 단 꿀이 아니고 양봉가들의 핍니다. 피.” 23년째 양봉업을 하고 있는 그는 그동안 안 가본 곳이 없다.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출발해 강원도 철원의 민통선까지 안씨는 꽃을 따라 전국을 누빈다. 벌통 근처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설익은 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안씨. 수풀 속 가시덤불에 상처를 입고 자다가 일어나보면 똬리를 틀고 있는 뱀에 화들짝 놀라기가 일쑤다. 1년이면 외지에서 지내는 시간이 6개월을 넘지만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남의 동네 꿀 다 따간다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힘든 고생 끝에 그는 양봉업을 시작한 지 6년만에 25개의 벌통을 200개로 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안씨는 1987년 셀마 태풍으로 200개의 벌통 모두를 잃었다. “가방 하나 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한심한지. 다시는 양봉 안 한다고 다짐했지요."
하지만 이듬해 꽃이 피자 안씨는 다시 양봉을 시작했다. 매서운 태풍도 안씨의 벌에 대한 집착을 꺾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듬해에 50년만의 대풍이 난 거예요.” 안씨는 빚으로 마련한 60개의 벌통으로 평소 200통으로 뜰 수 있는 양의 2배가 넘는 꿀을 모아 보기 좋게 재기에 성공했다.
“아무리 꿀이 좋으면 뭐합니까. 열심히 꿀을 따도 사람들이 진짜 꿀이라고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안씨가 몸에 벌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꿀에 대한 불신감 때문. 안씨는 시골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장사를 생각했다. “큰 뱀을 갖고 쇼를 하면서 약 파는 사람들 있잖아요. 뱀이 없으면 그 약이 팔리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벌을 갖고 꿀 장사를 해보기로 한 거죠."
안씨는 97년 기네스 기록을 세운 데 이어 2002년에는 22만마리의 벌을 붙이고 번지점프를 해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그럼 그에게 벌에 쏘이지 않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런 거 없습니다. 저도 아프죠. 제가 22만마리 벌을 붙였을 때 벌침 380방을 쏘였거든요. 행사 끝나고 병원 가서 다 뽑았습니다.” 안씨는 무게가 500kg 나가는 황소도 벌에게 250번 정도 쏘이면 즉사한다고 말한다. 그가 380방의 벌침을 쏘이고도 무사한 것은 20년 넘게 벌을 기르며 벌침에 대한 내성을 기른 까닭으로 일반인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안씨는 앞으로 꿀 시장이 개방되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지금 꿀 수입 관세가 240%인데 이게 떨어지면 호주 중국 인도 꿀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싼 꿀을 먹으면 좋겠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안씨는 꿀은 생태계라고 말한다. 꿀이 싸게 들어오면 양봉업자들이 망하고 양봉업자들이 망하면 벌이 사라져 꽃들이 수정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벌이 중요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야죠. 앞으로 더 큰 이벤트를 준비 중입니다.” 안씨의 벌 붙이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모양이다.
/여론독자부기자 ting@segye.com
<사진>안상규씨가 8kg 무게의 벌수염을 만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