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감독의 장남 고로를 감독에 앉혀 20여 년 동안의 소원을 풀었다. 39세인 미야자키 고로는 건설 컨설턴트로 지브리 미술관을 디자인하고 관장을 맡은 것을 빼고는 지브리나 애니메이션과 담을 쌓고 지냈다. 제작자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바쁜 미야자키 감독 대신 일을 맡긴 덕분에 고로 감독은 아버지가 개척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동참하게 됐다. ‘어스시의 마법사’는 모두 6권으로 구성된 연대기다. 게드전기는 그 중 제3편을 주요 모태로 삼고 외전을 참고해 영화화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나타난 용 두 마리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목격된 후 인간 세계의 생명들은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어가고 마법사들은 마법을 잃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국왕을 죽이고 도망치던 아렌 왕자는 우연히 마법사 하이타카(게드)를 만나게 된다. 하이타카는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악의 근원을 찾아 여행 중이었다. 이 둘은 세상을 구하고자 함께 모험을 떠나고 어둠의 마을 호크타운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아렌 왕자는 위험에 처한 소녀 테루를 구한다. 한편 하이타카와 아렌은 암흑의 문을 연 장본인이 거미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들의 대결이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익숙한 지브리표 비주얼이 펼쳐진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데 걸린 시간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방대한 서사를 자랑하는 원작의 기세에 눌린 탓일까. 게드전기는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의 미덕인 생생한 캐릭터, 신나는 어드벤처, 훈훈한 유머, 철학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주눅 들어 있다.
전반부에는 마법사 하이타카가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에는 아렌과 테루가 고군분투하며 어둠의 마법사 거미와 대결한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헷갈리면서 영화의 축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영화적 재미를 포기하면서도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담으려 노력했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에겐 영화 진행이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도 흠이다. 종반 아렌(레반넨)과 테루(테하루)가 서로 ‘진실의 이름’을 불러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작에서 표현된 어스시 세계의 독특한 점인 마법 사용법을 소홀히 처리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서로 진실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묘사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은 “목숨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든가, “어둠과 빛은 함께 있어야 해” 등의 대사를 쏟아낸다. 대사로 직접 철학을 담아내는 건 서사 구조의 취약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듯하다. 영화를 본 뒤 되뇌게 되는 쉽지만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은 이 작품에서는 빛을 잃었다.
미야자키 하야오표 혹은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의 적통을 계승할 고로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신혜선 기자 sunsh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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