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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창설 66돌 독립투사 김승곤 옹 병상 메시지

입력 : 2006-09-15 17:23:00 수정 : 2006-09-15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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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외치며 정작 독립운동 증언은 외면” 오는 17일은 항일 무력투쟁을 이끈 광복군 창설 66돌을 맞는 날이다. 하지만 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고 변변한 기념식조차 찾아보기 힘든 게 작금의 현실이다. 더구나 조국 광복에 헌신한 분들의 활동을 되새기고 역사 자료로 남기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에 세계일보는 광복군에 몸담았던 한 독립투사의 회고를 통해 생의 마감을 앞둔 독립운동가들의 증언 채취와 활동 보존작업이 시급함을 알리고자 한다.
[관련기사]"생존 애국지사 증언 기록화 시급”
[관련기사]"독립운동사조차 일본자료로 연구”
아흔을 넘긴 독립투사의 눈가엔 금세 이슬이 맺혔다. 독립운동 이야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낯선 방문객에 자못 감격한 모습이었다. 3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는 자신의 체온을 통해 직접 독립정신을 전해주려는 듯 손자뻘 되는 젊은이의 손을 꼭 잡았다.
14일 오전 서울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 2인용 병실에서 항일독립운동사의 ‘산 증인’ 김승곤(91·전 광복회장) 옹을 만났다. 그는 내방객에게 엷은 미소를 띤 채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젊은이…. 독립운동을…. 듣겠다고….”
오랜 노환으로 혀가 굳어 간병인조차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가쁜 숨으로 30분 이상 말을 계속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둔 단어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건강을 염려한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증언이 독립투사로서의 마지막 유언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김옹은 1933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전남 담양에서 학교를 다니다 의열단이 일본 앞잡이들을 처단하는 단원들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꼴을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더라고. 부모님이 반대할까 봐 상의도 드리지 않고 몰래 집을 나선 거지.”
상해에 도착한 그는 의열단 군사정치 간부학교와 중국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뤄양(洛陽)육군사관학교를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에 가담했고 광복군 초기멤버로 활동했다.
“중국 창사(長沙)에서 일본군과의 첫 싸움을 앞두고 우리가 외쳤던 구호가 ‘3일 동안 굶고, 잠 안 자고, 안 씻는다’였어. 그만큼 우린 독하게 싸움을 준비했어. 중국군도 우리를 보고 ‘독종’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
육신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노쇠했지만 광복군 활동에 대한 김옹의 기억만큼은 또렷하기만 했다. 김옹은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의 중국 제9전구지역에 도착해 제1차 창사대회전에 참전해 한·중 합작군 100여명과 함께 일본군 600명에 맞서 싸웠던 1939년 당시를 떠올렸다.
“일본군이 기관총 7정을 앞세워 난사를 했는데 우리는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정확한 사격으로 한놈 한놈 쓰러뜨리는 전법으로 대응했어. 내 개인적으로는 그게 첫 전투였지만 이미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인지 그리 무섭지 않았어.”
말하는 내내 숨이 차 여러 번 말을 중단하면서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옛 기억을 되살렸다. 전투 상황을 설명할 때는 병상 철골 지지대를 주먹으로 칠 정도로 독립투사의 기백은 아직도 그의 몸에 살아 있었다.
“일본군이 쏜 대포가 우리 머리 위에서 터져 머리가 멍해지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지만, 그 전투에서 우리는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어.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본 중국군들이 다들 놀라는 거야.”
이후 그는 구룡산과 오봉산 전투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를 거쳐 광복군에 입대한 것은 1942년이었다. 임시정부 휘하에 광복군이 창설된 뒤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광복군 제1지대 부관주임 겸 본부 구대장으로 활동한 뒤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일했다.
광복군이 해방 직전 한·미 합동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실현하지 못한 것이 그는 “두고두고 아쉽다”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진공작전을 준비를 했는데…. 일본이 며칠만 늦게 항복 선언을 했어도 우리 손으로 광복을 맞을 수 있었을 거야.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해서 잠이 안 와.”
중국 충칭(重慶)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망명객의 설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을 밟는 데는 해방 후에도 1년이란 세월이 더 걸렸다.
“국내외 복잡한 정치사정으로 귀국이 자꾸 미뤄진 거지. 처음 임시정부에 우호적이었던 중국이 입장을 바꿔 이듬해인 5월에 광복군 해산령을 내렸어. 그 바람에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대원들이 이국 땅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어.”
1946년 7월에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선 독립운동했다는 말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유당 정권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철저히 숨기고 친일파들을 대거 발탁했던 탓이었다.
“우리를 쫓던 친일경찰들이 서울의 치안을 장악하고 있으니 어떻게 자랑하고 다녔겠나. 오히려 친일했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세상이 된 거야….”
김옹은 매년 가을철이 돌아오면 생사고락을 같이 한 옛 동지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가 청춘을 바쳤던 조선의용대(1938년 10월10일 창설)와 광복군(1940년 9월17일 창군)이 이맘때 창설됐기 때문이다. 회상에 잠긴 듯 김옹은 잠시 눈을 감았다.
“세월은 이길 수 없지. 이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독립운동가들도 이제 한 200여명 남았나. 광복 70주년이 오기 전에 모두 생을 마감하겠지. 그러면 우리들의 자취도 잊혀지겠지.”
김옹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요즘 세태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다.
독도문제나 일본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친일파 재산환수문제 등이 발생하면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지만 정작 소중한 독립운동 유산과 그 기록에 대해선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행정당국도 전시성 사업에 예산을 많이 쓰면서 정작 역사자료의 복원과 보존에는 시큰둥하다.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증언이나 기록이 외면당한 거야. 이제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왜 다시 끄집어내느냐고 홀대하고 있으니….”
김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간병인의 만류도 만류지만 그의 건강을 생각해 더 이상 ‘독립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병원을 나선 뒤 ‘잘가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김옹의 모습이 높푸른 가을하늘 구름 사이로 자꾸만 어른거렸다.

장원주 기자 stru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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