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백영옥(34)씨의 장편소설 ‘스타일’(예담) 속 패션잡지사 편집장은 미(美) 지상주의자다. 후배 기자가 남긴 메모에서도 글씨체의 미학을 따질 정도다.
소설 ‘스타일’은, 잡지 편집장의 말투를 빌리면, “재미있어야 해, 무조건”이란 철칙 아래 쓰였다. 패션·연예계의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 ‘비굴 모드’로 살아가는 직장인의 푸념, 음식·명품·연애에 대한 수다로 지루할 틈이 없다. 감각적이고 생동감 있는 문체는 가독성을 한껏 높인다. 세계일보가 주최한 1억원 고료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이유이기도 하다.
#재미있어야 해, 무조건 재미있어야 해
비화(秘話)를 들추는 재미, 풍자의 재미를 준다. ‘스타일’은 우아해 보이는 패션계의 감춰진 실상을 소재로 웃음을 자아낸다. 31세 여성 이서정은 패션 잡지 〈A〉매거진의 7년차 기자다. 웰빙 기사를 쓰면서 정작 자신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처지다. 영화배우 정시연을 인터뷰하기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베일에 싸인 명칼럼니스트 ‘닥터 레스토랑’을 취재하라는 지시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서정은 변덕스러운 배우들, 시기심 많은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한다. 그는 패션계의 모순과 허영을 비웃으면서도 세계적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의 옷 앞에서 황홀해 한다.
간간이 노출되는 30대 초반 여성의 사생활 역시 흥밋거리다. 56㎏인 몸무게에 좌절하는 모습, 멋진 연애를 꿈꾸는 속내가 가식 없이 드러나 있다. 키 크고 능력 있는 두 남성과 얽히는 삼각관계는 여성의 판타지를 대변한다.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 백영옥씨는 “명품에 열광하면서도 소말리아 어린이를 동정하는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가 흥미롭다”고 말한다. |
# 솔직해야 해, 무조건 솔직해야 해.
“나는 종종 패션계 사람들의 속 안이 공갈빵 같다고 생각한다.”
서정의 동료는 고작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아우디를 몬다. 사글세를 사는 주제에 BMW 오토바이로 폼을 잡는다. 서정의 일터는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임을 신봉하는” 곳이다. 허풍의 세계에서 작성된 기사가 진실하기 어렵다. 서정은 “내가 쓴 레스토랑 기사의 80퍼센트는 뻥”이라고 자조한다.
하지만 그는 표리부동한 패션잡지 세계를 야유하지 않는다. 서정은 윤리적 재판자가 아닌 욕망을 긍정하는 평범한 현대 여성일 뿐이다. 그는 ‘프랭크 뮬러’ 시계, ‘마크 제이콥스’ 백, 킹크랩 살을 올린 수제 페투치네(파스타의 일종)에 감동한다.
“전 언제나 현재만 바라보면서 제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왔어요. 제대로 된 수트를 입거나 완벽한 구두를 신는 일에도 진정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281쪽)
서정은 ‘된장녀’ 혐의를 무릅쓰고, 명품에 대한 애정을 솔직하게 표출한다. 솔직함은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이다. 서정은 법정의 에세이 ‘무소유’를 읽고, “왜 아무것도 소유하면 안 돼요?”라며 반감을 가지는 여자다. 백치로 여겨질 것을 개의치 않고 속내를 말하는 당당함과 솔직함은 이 시대의 한 속성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세계문학상 심사를 맡았던 한 평론가도 “더러운 세계를 견디면서 진정성을 지켜 가려는 젊은이를 끌어안았다는 점, 이 시대의 피상성과 깊이 없음을 쿨하게 잘 형상화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작가 백씨는 “세상살이에 대한 고민은 쪽방촌·고시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에도 있다”면서 “계층적 위화감 때문에 우리 문학에서 배제된 세계를 다뤄 그곳에도 고독과 비애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재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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