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얘기다. 하지만 페니실린처럼 유익한 곰팡이가 있듯이 와인에도 곰팡이가 유익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바로 ‘노블 롯(noble rot)’, 학명으로는 ‘보트리티스 시네리아(Botrytis Cinerea)’라고 부르는 곰팡이로 최고급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곰팡이는 어느 지역에서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일교차가 심한 늦가을에 강 근처의 포도밭에서만 생성된다. 늦가을 일교차로 인해 한밤중이나 새벽, 차고 습한 공기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포도밭 전체에 퍼지면서 노블 롯은 포도송이 표면에 내려 앉게 된다. 아침에 햇살이 비치고 낮엔 온도가 올라가면서 포도밭의 습기를 걷어내면 밤새 포도송이 위로 퍼지던 노블 롯은 더 이상 표면에 번지질 않고 대신 포도알 껍질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껍질은 약해지고 포도알 수분이 50% 이상 증발된다. 또 포도알은 곰팡이의 영향으로 마치 상한 포도처럼 모양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런 추한 외모와 달리 포도송이 내부에선 수분 증발로 인한 당도와 산도가 올라갈 뿐 아니라 노블 롯의 영향으로 여러 가지 화학 변화가 발생해 다른 포도들이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향과 맛이 복합적으로 형성된다.
노블 롯의 영향을 받은 포도는 평균 10월부터 11월까지 수확이 이뤄진다. 그러나 전체 포도가 곰팡이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수시로 포도밭에 나가서 일일이 노블 롯의 진행 과정을 체크해 곰팡이의 영향을 받은 포도알만 골라서 수확한다.
위에서 말한 기후 조건이 매년 만족스럽게 형성된다는 보장이 없다. 다른 포도 수확에 비해 시간도 매우 오래 걸리며 비용이나 인력소비가 많고 포도의 수분이 많이 증발돼 양도 매우 적다. 그래서 보트리티스 와인(노블 롯 영향을 받은 와인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은 대체적으로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대표적인 와인은 스위트 와인의 대명사인 보르도의 소테른이 있다. 껍질이 얇아 노블 롯의 영향을 쉽게 받는 세미용을 주 품종으로 상큼한 과일 향을 보태기 위해 소비뇽 블랑을 블렌딩한다. 소테른 와인은 감귤류와 말린 살구와 같은 과일 향에 구수한 빵 냄새, 오크 숙성에서 오는 바닐라 향이나 크리미한 풍미도 곁들여진다.
알코올 도수도 높고 전반적으로 풀보디 스타일에 상당히 부드럽고 마음씨 좋은 풍만한 스타일 느낌의 여인이 연상된다. 이에 비해 독일의 보트리티스 와인은 여러 와인 산지에서 만들어져서 어느 특정 지역을 꼽기보다는 독일 와인의 품질 등급 중 가장 높은 베렌아우스레제와 트로켄 베렌아우스레제 등급에 속한 와인들이다. 이 최고급 스위트들은 리즐링으로 주로 만들며 복숭아나 살구, 건포도, 오렌지 마멀레이드 같은 풍부한 과일 맛에 상큼한 산미가 받쳐준다.
입에서 여운이 긴 섬세한 스타일에 보디감도 그리 크지 않고 알코올 도수도 낮아 소테른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또 하나 대표적인 스위트 와인인 헝가리의 ‘토카이 오수(Tokaji Aszu)’는 오랜 오크통 숙성으로 호박색을 띠며 오렌지 껍질, 말린 살구, 무화과, 계피 향에 견과류나 커피, 캐러멜 풍미도 진하다. 당도가 높아도 산미가 워낙 강해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 외에도 프랑스 루아르 지방의 앙주 소뮈르지역에서 나오는 ‘코토 뒤 레이옹(Coteaux du Layon)’이나 알자스의 보트리티스 와인도 앞서 말한 와인들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품질좋은 스위트 와인들이다.

몇 년 전 런던에서 열린 보트리티스 와인 포럼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최고급 소테른 와인인 샤토 디켐을 시음한 적이 있다. 포럼을 다 마치고 나오는데 와인 잔에 남아있는 황금빛 액체를 무심히 두고 갈 수 없어 샤토 디켐을 천천히 한모금 입에 물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잔 정도 양의 와인이 나온다는 샤토 디켐…. 와인은 입 안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며 오렌지 특유의 쌉쌀함에 농익은 과일 향과 캐러멜 향이 입안 가득 맴돌고 있다가 마지막에 긴 여운을 주며 사라졌다. 자연과 인간의 오랜 교감 속에 탄생한 이 황금빛 와인의 긴 여운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만 전해줄 수 있을 뿐, 함께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WSET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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