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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입력 : 2009-03-31 17:16:49 수정 : 2009-03-31 17: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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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태종에게 ‘눈엣가시’… 개성은 풍수상 부적합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묻혀있는 경기 구리시 동구릉의 건원릉. 태조는 본처이자 태종 이방원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지 못했다.
조선왕조에서 왕릉이 가장 많이 조성된 곳은 어디일까? 바로 현재 경기 구리시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 지역이다. 이곳에는 조선의 첫 왕인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도 있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건원릉에 태조의 무덤만 덩그러니 조성돼 있는 것에 의문이 든다. 태조에게 왕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신의왕후뿐만 아니라 계비인 신덕왕후까지 있었음에도 태조가 홀로 묻힌 까닭은 무엇일까?

◇태조 이성계의 어진.
#1.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貞陵)을 둘러싼 갈등

유교사상이 국가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조선시대. 돌아가신 선왕에 대한 상례와 제례는 현왕이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의례였다. 왕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 조성에 왕조의 역량이 총결집되었던 것 역시 예법을 다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첫 왕인 태조의 무덤부터 최선의 예를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태조가 왕비 없이 혼자 묻히는 불운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운의 배경에는 조선 초기 태종과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조 말년 태조는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본처인 신의왕후의 자식들을 제쳐놓고,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지명했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격분했다. 급기야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을 제거하고 형 정종을 왕으로 올렸다. 태조 역시 막내를 죽인 주범 이방원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방석의 죽음에 화가 난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태종과 한곳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태조와 태종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죽기 직전 태조와 태종의 화해는 이루어졌지만, 태조가 죽은 후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고민은 이어졌다. 조선 건국 전에 죽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무덤(재릉)은 개성에 있었고, 계모 신덕왕후의 무덤(정릉)이 서울에 조성되어 있었지만 그 옆에 아버지를 모셔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강씨가 생존하던 시절에도 이방원과 강씨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 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정도전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앉히면서 방원의 강씨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 태조에 앞서 계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그녀에게 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내리고, 왕릉도 궁궐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만들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궁궐에서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정도로 계비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서울 성북구 정릉. 정릉은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방원의 눈에는 태조가 조성한 정릉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결국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1409년(태종 9) 정릉은 도성 밖 양주 지방, 현재의 정릉(서울 성북구) 자리로 옮겨졌다. 이어 태종은 원래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니, 강씨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어떠했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복원된 청계천의 광통교 밑에는 신덕왕후의 무덤에서 가져왔다는 석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옛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태종은 정릉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도록 했으나, 현종 시대에 송시열 등의 건의에 의해 복구되었다. 잡초가 우거져 찾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정릉은 철저히 방치되어 있다가 비로소 왕비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정릉에 대한 제사를 다시 베풀던 날에 소낙비가 이 일대에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을 씻는 비라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원래 정릉이 있었던 자리는 현재에도 정동(貞洞)으로 불리면서 희미하게나마 신덕왕후의 자취를 알려주고 있다.

◇아버지의 계비였던 신덕왕후를 증오했던 태종 이방원은 청계천 광통교를 복원할 때 정릉(신덕왕후 무덤)의 돌을 사용하게 했다.
#2. 건원릉, 검암산 자락에 들어서다

결국 태조의 무덤 건원릉은 신의왕후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하였다. 신의왕후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여 개성의 재릉에 묻혔으나,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적절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태조의 무덤이 신덕왕후 곁에 갈 수 없었다. 왕릉 조성의 실질적인 집행자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첫 왕릉인 건원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의 의궤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의궤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 전기의 의궤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따라서 건원릉 조성 과정은 실록의 기록을 통해 찾을 수 있다. 1408년 5월 22일 태조가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조선에서 처음 맞는 왕의 죽음인 만큼 국장에 관한 각종 의식과 절차가 요구되었다. 의정부에서는 즉시 빈전(殯殿)·국장(國葬)·조묘(造墓)·재(齋)의 네 곳 도감을 설치하고 상복, 옥책, 제기, 관곽(棺槨), 의장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빈전도감은 관을 임시로 모시는 일을, 국장도감은 왕의 장례를, 조묘도감은 왕릉 조성을 담당하였다. 조묘도감은 후에 산릉도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태종실록’에는 건원릉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등장한다. 1408년(태종 8) 6월 12일 산릉 자리를 찾아보라는 태종의 명을 받은 하륜이 행주를 천거하지만 태종이 다른 곳을 알아볼 것을 지시하였고, 6월 28일 마침내 태조의 산릉을 양주의 검암(儉巖)에 정한 기록이 나타난다. 하륜 등이 양주의 능자리를 보는데, 검교 김인귀가 하륜 등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검암에 길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륜 등이 가서 보니 과연 좋아서 조묘도감 제조 박자청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7월 26일에는 산릉의 기일이 가까워지자 석실(石室)을 만들었으며, 7월 29일에는 태조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개경사에 노비 150명과 전지 300결을 소속시켰다. 태종은 황희에게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것을 하는 것은 부왕의 대사를 당하여 시비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태조의 장례식에 불교적 요소가 다분히 묻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회암사와 같은 왕궁에 비견되는 절을 조성하고 이곳에 기거하려 했던 태조 생전의 처신과도 일면 부합되고 있다. 태종은 산릉의 수호군 100명을 두어 왕릉을 지키게 하였으며, 산릉 조성이 끝난 후인 9월 9일 태종은 영구를 받들고 건원릉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태조의 무덤은 특이하게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가 심어져 있는데,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함흥의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덮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진정 원치 않는 곳에 묻은 불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것일까?

◇경기 구리시 동구릉 지역에 조성된 목릉. 목릉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3. 동구릉에 숨어 있는 역사와 문화

조선의 첫 왕인 태조의 무덤은 양주 검암산 자락, 현재의 구리시 동구릉 일대에 조성된 이래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이라 그런지 태조 이후에도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 속속 모여들었다. 문종(현릉), 선조(목릉), 현종(숭릉), 영조(원릉), 헌종(경릉) 등 여섯 왕이 뒤를 이었고,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휘릉과 단의왕후(경종의 원비)의 혜릉 등 두 명의 왕비, 왕세자로 승하했다가 왕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함께하여 총 9기의 왕과 왕비릉이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동육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문조(효명세자)의 무덤이 철종 때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현재의 지명인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6명(22.2%)의 왕릉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 지역이 왕릉 공간으로 적합했음을 입증한다. 산자락이 여러 군데로 뻗쳐 있어서 대규모 왕릉군이 조성되기에도 유리한 구역이기도 했고,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이었다. 또한 왕실의 무덤은 서오릉이나 서삼릉의 예에서도 보듯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집단적으로 조성되는 경향이 있으며, 가능한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히려는 왕의 의지, 같은 경역 내에 왕릉을 조성하면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동구릉 지역은 조선 최대의 왕릉 조성지가 되었다.

동구릉의 왕릉들은 서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왕릉은 숨은 역사 이야기를 전해 준다. 선조의 무덤인 목릉 지역에는 정비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가 서로 다른 산자락에 모셔져 있고, 영조의 원릉은 조강지처 정성왕후를 버리고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묻힌 모습이다. 헌종의 무덤인 경릉은 정비와 계비의 구분이 부담스러웠던지 헌종의 무덤 곁에 두 왕비를 나란히 묻은 삼연릉(三連陵) 형식을 띠고 있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왕릉의 석물들 역시 시대별로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병풍석이 없는 왕릉 등 석물 구성도 조금씩 다르다. 문화재청에서 나온 ‘조선왕릉 답사수첩’은 이런 의문들을 조금씩 해결해 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건원릉을 비롯한 동구릉을 감싸고 있는 무성한 수목들은 봄의 기운을 더욱 느끼게 해줄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동구릉을 답사하면서 조선 왕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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