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국가브로드밴드계획’ 배워야
권영선 KAIST교수·경제학 |
우리나라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문화적 상징의 하나를 꼽으라면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빨리빨리’라는 어구를 언급한다. 이러한 우리의 문화적 특성은 인터넷 정책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우리는 속도가 느린 인터넷을 묘사하기 위해 ‘참을 인’(忍)자를 이용하기도 하고, 인터넷의 정보 전달 속도에 중점을 두어 정보전송 속도가 빠른 인터넷을 초고속 인터넷이라고 부른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기가(Giga) 인터넷 구축 계획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잘 나타난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표현 대신에 브로드밴드 인터넷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브로드밴드는 통신에 사용된 주파수의 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신에 이용된 주파수의 폭이 넓으면 같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마치 도로의 폭이 넓으면 많은 교통량을 소화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초고속 인터넷은 정보의 전달 속도를 강조한 표현이고 브로드밴드는 정보가 소통하는 통로의 폭에 초점을 맞춘 표현으로서, 양자 모두 동일한 통신기술의 다른 측면을 강조한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국 의회는 올해 2월 미국 경제의 회생을 위한 포괄적 법안을 승인하면서 72억달러를 국가 브로드밴드 정책 수행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배정했고 통신방송 정책을 주관하는 연방통신위원회로 하여금 2010년 2월17일까지 국가브로드밴드 계획을 수립해 보고하도록 했다. 따라서 동 위원회는 4월 국가브로드밴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기본 골격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광범위한 의견 청취 및 데이터 수집에 착수했다.
연방통신위원회는 이미 5월 시골 지역의 브로드밴드 보급 확산계획을 의회에 보고했고,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브로드밴드 정책을 논의·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브로드밴드 데이터 수집에 관한 의견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처음 수립하는 국가브로드밴드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신속한 계획 수립보다 폭 넓은 의견 청취와 자료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방송통신 기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이익단체와 연구소 및 학술단체의 토론회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고, 연방통신위원회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의견을 구하고 있다.
특히, 의회는 연방통신위원회로 하여금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해 국가브로드밴드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고 연방통신위원회는 무슨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하면서 산·학·연으로부터 의견을 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방송통신 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가치판단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이념이나 주관에 기초한 추상적 논쟁은 피하고 데이터에 근거해 미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과학적·생산적으로 해결해 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우리나라가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활용에 있어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보다 앞선 부분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결코 일반적으로 앞서 있는 것은 아니며, 현재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인터넷의 효과적 활용을 위한 데이터에 근거한 객관적 논의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얼마 전 미국 공무원이 우리의 초고속 인터넷 정책을 배우기 위해 방문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우리도 자만하지 말고 미국의 국가브로드밴드 계획 수립 과정에서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권영선 KAIST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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