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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발굴 성패 日 자료 확보에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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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3-26 13:06:33 수정 : 2010-03-26 13: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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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차 발굴조사단’ 지휘 박선주 충북대 교수
"매장 추정 감옥뒷편 공장세워져 이장이나 멸실 우려"
"뤼순감옥 기록 소실불구 日엔 자료 존재 가능성 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의 성패는 일본 정부나 민간에서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관련 자료를 어떻게, 얼마나 확보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2008년 3월 안 의사 유해발굴조사단에서 발굴 작업을 지휘했던 박선주 충북대 교수(사진)는 25일 “현재로선 발굴 가능성이 높지 않다. 때문에 지난번 발굴 실패의 원인과 추가 발굴 후보지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보훈처 주관으로 이뤄진 유해발굴조사에서 유해 매장지를 추측할 수 있는 사형 당일 보고서에 적힌 ‘뤼순(旅順) 매장’이란 기록과, 뤼순감옥 일본인 소장 딸이 공개한 사진 2장을 근거로 감옥 뒷편 매장 추정지 발굴작업을 했지만 성과를 못 거뒀다. 이후 발굴 실패 원인과 유해 매립 예상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됐다.

박 교수는 1차 발굴 실패 원인과 2차 발굴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했다. 그는 “1차 발굴 실패는 조사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매장지로 추정된 감옥 뒷편 위안바오산(元寶山) 하단부가 길이 30m, 깊이 4∼5m로 파여져 도자기 파편 등 쓰레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라며 “이는 1916년과 1918년, 1921년 일본이 뤼순감옥 증·개축을 하면서 인근에 벽돌공장을 지었고 벽돌을 만들기 위한 흙을 파내면서 매장지로 유력시되던 곳을 쓰레기로 채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안 의사 유해는 이장됐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지 않다면 멸실(滅失)의 우려도 있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묘역이 뤼순감옥에서 동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라는 표지석이 설치된 야산’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신빙성이 낮다고 말했다.

대신 새로 구성되는 발굴단이 위안바오산 끝자락에 있는 길이 20m, 폭 2∼3m의 가톨릭 신자 묘지와 2008년 발굴 지역과 경계선상에 있던 군부대 쪽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두 지역은 안 의사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뤼순감옥 간수와 그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며, 마을 주민들로부터 1910년대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묘지가 조성돼 있었다는 진술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해 발굴의 성패를 묻는 질문에 박 교수는 “정확한 문헌자료가 나와야 한다”면서 일본정부를 겨냥했다. 안 의사가 순국한 1910년을 기점으로 1920년 사이 발굴 대상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뤼순감옥에선 사형 집행 후 시신을 가족들에게 대부분 돌려줬으며, 당시 감옥묘지에 매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는 무연고였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가 가족이 있는 안 의사를 감옥 인근에 매장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뤼순감옥 기록이 3일간 불태워졌다고 하나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의 특성상 본국에 관련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일본정부가 계속 입을 닫을 경우 민간 차원의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1911년 뤼순감옥에서 천도법회를 지낸 사진이 있는 만큼 일본 불교계 등에서 사형 집행과 관련된 흔적을 찾거나 벽돌공장 관련 기록, 뤼순감옥에 근무했던 간수나 그 가족의 후손을 찾아 자료를 모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박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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