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화포의 발달과 함께 고대 병장무예인 십팔기의 효용성이 차츰 떨어지다가 신식 군대의 신설로 인한 구식 군대의 차별, 그로 인한 임오군란, 외세 개입을 거쳐 결국 나라가 망하면서 무예 십팔기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신 그 자리에 검도와 유도로 대표되는 일본무도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인류 문화의 문(文)과 무(武)는 항상 문화의 원형적 구조로 자리 잡고 있는데, 식민지는 다름 아닌 남의 문과 남의 무에 의지하여 문화를 운영해나가는 국가를 말한다. 자주국가란 자신의 문과 자신의 무를 중심으로 문화를 운영해나가는 국가를 말한다. 문화 교류도 자신의 것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종속된다. 일본의 무도 교육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군과 경찰, 심지어 학교에까지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해방된 지 65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무도는 어느덧 우리 것으로 되었다.
![]() |
◇해범 김광석(왼쪽) 선생이 십팔기 동작을 시범하고 있는 모습. |
식민 시절의 일본 무도 및 해방 후 중국무술의 유입 과정과 새로 생겨난 우리 전통무예의 왜곡, 그로 인한 우리 민족정신과 정체성의 단절과 혼란은 중선진국이 된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십팔기로 대변되는 전통무예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병행되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일제 시절 조선의 국기였던 ‘십팔기’의 실체는 단 한 번도 역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단지 그 이름만 전설처럼 전해왔었다. 지금의 80, 90대 어른 중 몇몇이 이름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 |
◇권법 |
한국무예의 지형도를 살피는 데 가장 적절한 중심 인물은 역시 십팔기의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다. 해범 선생은 초창기 한국 근대무예의 중심에서 여러 무예인과 교류하였으며, 중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무예에 뜻을 둔 인물들을 안내하고 방향을 잡게 하는 등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 해범 선생과 교류한 인물 중에 한국 무예계를 대표하는 신화적 인물이 여럿 있지만, 일본 체술원 출신의 반기하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반 선생은 제자를 기르지 않아 그의 대가 끊어졌다는 점이 약점이긴 하지만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가라테가 일본의 대중적인 무도였다면 체술(體術)은 귀족들의 무도였다. 체술은 일본 왕족과 귀족들만을 위한 호신술이었다. 체술원에서는 도합 16가지의 체술을 가르쳤는데, 모두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맨손 기예들로서 잡아채고, 꺾고, 넘어뜨리고, 젖히는 금나술(擒拿術) 위주였다. 이와 유사한 기예들이 1940년대 전후에 일본 시중에서 호신술로 보급되다가 합기도(合氣道)로 진화한다.
반 선생은 체술을 비롯해 여러 무예를 섭렵하고 또 나름대로 큰 성취를 얻었으나, 시중의 무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안 내력이 친일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자숙하는 의미에서 현실 참여에 회의적이었고, 중국 등지로 떠다니며 낭인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는 체술은 물론이고 합기(내공)와 중국무술도 상당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분이다. 그는 결국 한중일 무술을 전부 익힌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래서 해범 선생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 |
◇쌍검 |
합기도계의 많은 원로들이 반 선생을 만나기를 소원하였지만 실현한 적이 없었고, 또한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고 80년 무렵 타계했다. 생전에 무예계 사람으로는 오직 해범 선생과만 교류하였다. 60년 후반에서 70년 초반, 십팔기의 서울역 도장으로 해범 선생을 자주 찾았다. 항상 해범 선생과 도장 옥상에 올라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서로 무예를 교류하였다. 해범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서 자신의 무예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무도가 일제 때 들어왔다면 중국 무술은 50년대 후반부터 들어왔다. 서울과 인천에 있던 화교학교에서 국술을 가르치던 이지랑 선생과 이대 앞에서 도장을 연 임품장 선생, 그리고 노수전 선생이 60년 무렵, 삼각지에 중국 무술 도장을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덕강 선생이 지금까지 임품장 선생의 도장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이때 여러 명의 한국인이 여기서 중국무술을 배워 나갔다. 당시 중국무예는 중국의 정통 명가라기보다는 대개 대만이나 홍콩의 시중에 퍼져 있던 호신용 권법들이었다. 중국 명가의 무예는 80년 전후로 들어왔다.
![]() |
◇본국검 |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간지에 무협소설이 연재되고, 뒤이어 중국 무협영화가 수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동안 중국인 도장에서 쿵후를 배우던 한국인들이 시중에다 너도나도 도장을 열기 시작했는데, 70년에는 서울 시내에 5, 6개 도장들이 새로 생겨났다. 마침 전 세계적인 ‘쿵후’ 열풍에 편승하여 중국 무술 도장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렇다 해도 전국 10여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쿵후(功夫)’란 말은 글자그대로 ‘공부하다’, ‘연마하다’, ‘닦다’는 뜻이었다. ‘쿵후(공부)’는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일을 뜻한다. 이것이 서양으로 건너가 중국무술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마셜 아트’(marshall art)니 하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이 그냥 수련한다고 말해준 것이 중국 무술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버린 것이다. 물론 서양인에게 설명하는 중국무술, 동양무술, 고전무술을 통칭하는 일반 용어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무예 종목을 가리키는 뜻은 아니다.
어쨌거나 한국 현대무예사에서 60, 70년대 이 중국인들의 쿵후 도장들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방 후 ‘십팔기’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69년 10월 3일, 해범 선생이 서울역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면서이다. 집안 내력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무예 십팔기와 심신수양법을 익혀온 해범 선생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정착하면서 적잖은 무예인들과 교유했었는데, 당시 마땅히 운동할 곳이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황기 선생의 무덕관)이나 중국무술(임품장) 도장을 오가며 혼자 수련하던 차에 아예 자신의 도장을 연 것이다. 그러자 중국 무술계의 원로들은 물론 서울의 모든 무술도장 관장들이 이곳을 사랑방처럼 드나들게 되면서 십팔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 |
◇장창 |
두 손으로 칼을 엄숙하게 잡으면 일본 검도, 창이나 봉 등 여타 병장기들을 다루면 중국무술, 권법을 하면 쿵후, 그저 맨주먹으로 벽돌이나 기왓장을 깨야 한국무술로 단정 짓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권법과 창봉 등 온갖 무기를 다루는 십팔기는 당연히 중국무술로 인식되었다. 무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반인들은 물론 무예인들조차도 중국 무협영화, 무협소설, 일본 무협만화를 통해서 얻은 꽤 허황된 상식이 고작이었다. 물론 병장기를 다루는 데 있어 중국무술, 일본무술, 한국무술이 그 기법에서 서로 크게 다를 수가 없고, 거의 유사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해범 선생만이 계속해서 십팔기가 우리 것이라고 고집하며, 그 이름 석 자 지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다만 도장 운영상 한 개뿐인 십팔기 권법 이외에 다른 호신용 권법이 더 필요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중국 권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는 쿵후가 아니면 배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쿵후도 함께 써 붙여야 했다.
그러면서 이 무렵 한국무예계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름의 무예 종목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도술’, ‘불무도’, ‘심검도’, ‘선무도’, ‘정신도법수련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개중에는 사라진 것들도 많았다. 물론 신생 무술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생겼지만 오래 역사를 만들어가는 무술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 |
◇현대 한국무술의 초창기에 중심 인물이 된 해범 김광석 선생과 원로 무예인들이 1970년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해범 선생의 ‘십팔기 도장’(서울역 부근) 개원을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일본 체술원 출신의 전설적 무예인 반기하 선생, 팔괘장의 노수전 노사, 뒷쪽 서 있는 사람이 김광석 선생. |
이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신비한 우리 무예라고 주장하지만 이 중에는 시중의 영화나 만화 혹은 무예서나 무협소설 등 근자에 모방하여 꾸며낸 이야기들이 많다. 역사적 단절이 불러온 혼란 속에 생겨난 생계용 신전통무예의 일부 종목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통무예가 신상품처럼 생겨나는 기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런 경우 무술이 진화(evolution)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involution)한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무술 프로그램보다 못한 무술이 생겨나서, 심하면 혹세무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의 복잡화를 통한 타락이다. 그래서 무술인들은 자신의 무술이 혹시 퇴화의 길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여야 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