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7분 긴급 대피방송 정적 깨…9시50분 민간인 280명 대피완료
방독면 끌어안고 숨조차 죽여…주민들 담요·약봉지·난로 챙겨와 “조용히 하세요!”
20일 오후 2시30분쯤 군의 해상사격훈련이 시작되자 대피소 안에 있는 군 부사관이 소리쳤다. 대화가 뚝 끊겼다. ‘쿵!’ ‘쿵쿵!’ 포격으로 인한 진동이 벽을 타고 등으로 전해졌다. 대피소 내 주민들은 긴장한 채 모두 숨을 죽였다. 누군가 조금만 움직이기만 해도 바닥에 깔린 스티로폼이 부스럭거렸다.
“움직이지 말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쿵!’ ‘쿵!’ ‘쿠르릉!’ 포격은 시차를 두고 반복됐다. “앞에 건 K-9이야.” 한 노인이 독백처럼 말했다. 아주머니들은 담요를 덮은 채 말이 없었다. 바로 전까지 시댁 어른들 흉을 보며 쿡쿡 웃던 표정은 싹 사라졌다.
◇우리 군의 연평도 해상사격훈련을 앞두고 20일 오전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에 대피령이 내려지자 주민들이 방공호에 모여 TV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옹진농협 연평지점 맞은편에 위치한 대피소에는 주민 17명과 군·경·면사무소 관계자, 취재진 등 51명이 빽빽이 모여앉았다. 포격 소리는 20분가량 이어진 뒤 끊겼다.
“1차 사격 끝난 건가.” 누군가 말했지만 상황을 아는 이가 없었다. 방공호 중앙에 모여 앉은 군·경 관계자들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옛 충민회관 뒤편 대피소 역시 포격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주머니들은 담요 밑으로 손을 잡았고 서로 안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어민 이정규(73)씨는 “기왕 시작했으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며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쿵! 쿠르릉….’ 포격이 재개됐다. 훈련이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농협 맞은편 대피소의 한쪽 구석을 차지한 할아버지들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할아버지들은 이내 버너에 물을 얹어 라면을 끓였고 소주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방독면 써보는 연평주민들 20일 우리 군이 해상사격훈련을 실시하기에 앞서 대피소에 도착한 연평도 주민들이 지급받은 방독면을 착용해 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신유택(70)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대피소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영상 전화였다. 오귀임(69) 할머니는 “손자(신재민·5)가 전화한 것”이라며 “아들네는 경기도 김포로 갔다”고 했다. 취재진의 방송카메라가 몰려들고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대피소는 한결 평온을 되찾았다. 훈련은 4시 넘도록 계속됐지만, 포격 소리는 할머니들의 대화 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후 5시 무렵, 합동참모본부 장교가 대피소를 찾아다니며 훈련 종료를 알렸고, 1시간30분가량 지난 뒤 대피령이 해제됐다. 연평교회 송중섭(45) 목사는 “북한이 대응하지 않고 훈련이 잘 끝나 연평 주민으로서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주민들은 9시간 넘도록 대피소에 머물며 그 어느 때보다 긴 하루를 보낸 뒤 컴컴한 골목길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앞서 이날 오전 8시7분 면사무소 직원이 대피 방송을 통해 마을을 깨웠다.
“금일 연평부대 해상사격훈련이 예정돼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께선 군, 경찰, 면사무소 안내요원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주민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9시부터는 ‘긴급히 대피하라’는 방송이 반복됐고, 면사무소 직원들은 곧바로 담당구역으로 흩어져 주민 대피를 유도했다. 9시50분쯤 대피소에 도착하자 “민간인 280여명 대피가 완료됐다”는 군 무전이 들렸고 곧이어 문이 잠겼다. 주민들은 지난번 대피소에서 모진 추위를 겪었던 탓인지 담요와 약 봉지 등을 챙겼고, 전기난로와 멀티탭 등을 꼼꼼히 챙겨 온 주민도 눈에 띄었다.
연평도=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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