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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1〉 내가 교보문고에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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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1-18 21:01:54 수정 : 2011-01-18 2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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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최전선·문화와 소통의 현장서 미래로 나아간다
스무 살 무렵 날마다 시립도서관에 나가 앉아 종일 책이나 읽던 청년이었다. 몇 년째 백수였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말을 어느 정도 실감으로 알아가던 때였다. 한 중학생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책이나 끼고 읽던 나는 늘 하찮은 인간이 될까 두려웠다. “나는 내 인생을 커피스푼으로 재어왔다”(T S 엘리엇)거나,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폴 발레리)라는 시구에 취해 그 몽롱함 속에서 혼자 시나 끼적이던 청년에겐 희망은 없었다. 그러다가 신춘문예 공모에서 덜컥 시가 당선된 직후, 한 신흥 출판사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이태쯤 뒤 한 후배를 데리고 출판사를 창업했다. 그 무렵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에 교보문고가 생겼다. 그 공간의 규모에 놀라고, 거기 진열된 책들의 규모에 놀랐다. 하나의 수정(水晶)으로 된 거대한 지식-기계, 지식의 광야에 우뚝 서 있는 랜드마크.

그때 나는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 시절 나라의 기강은 문란하고 정치는 흉흉하고 불의가 번성하는 듯했지만 나는 어둠을 뚫고 오는 빛줄기를 보았다. 꽃들은 지금보다 더 향기롭고, 여성들은 더 우아하고 정숙했다. 사람들은 책을 더 많이 읽고, 노래들은 지금보다 더 발랄했다. 교보문고가 생겨난 지 어느덧 서른 해라는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나의 파릇한 시절도 흘러갔다. 출판사를 접은 지 스무 해가 되고, 아이들은 내 슬하를 떠나 먼 데서 살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 저쪽으로 흘러가버린 것이다. “결코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이/ 삶을 그리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기쁘게 하지 않는다.”(에밀리 디킨슨)

문학은 자아의 화육(化育)이라고 할 만하다. 자아는 현실이라는 솥에서 뭉근히 고아지는데, 단단하던 것은 끓으면서 잘게 해체된다. 그것은 물렁물렁하고 금세 낱낱으로 분해되는 성질을 지닌 모호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있다고 믿어지는 환영이다. 마침내 감각과 느낌들이 끓어오르는 비등점에 이르면 자아는 다중이 모인 소란스러운 집회 장소로 변한다. 하나의 자아는 천 개의 가면을 쓰면서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으로 홀연히 변한다. 우리는 여전히 미혹과 미신이 판을 치는 중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삶아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끔찍한 유모들’에 둘러싸인 불길한 시대에 살고 있다(“그리하여 아직 유럽 도처에는 끔찍한 유모들이 있어 / 어린아이들을 삶아버리고 싶어 안달한다”, W.H Auden, ‘Voltaire at Ferney’ 중에서). ‘끔찍한 유모들’이란 비속한 정서와 욕망들을 가진 대중에 대한 은유로 적절하다!

나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교보문고를 간다. 교보문고를 갈 때마다 나는 기적을 체험한다. 이토록 엄청난 책들! 외환위기 이후 문학 출판은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지만 엄청나게 많은 문학-책들이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불황의 짙은 어둠 속에서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밀리언셀러가 나온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자꾸 남루해지고 끔찍해지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문학에서 위로와 위안을 구한다. 자꾸 바깥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은 ‘안쪽’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에 기대어 시대의 절망과 고통이 만드는 심리적 과부하를 견디려고 한다. 우리 기억의 안쪽에 가장 따뜻한 부분을 이루는 게 가족에 대한 기억이다.잃어버린 어머니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신경숙의 소설은 그런 점에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은 가족서사의 귀환이라고 할 만하다. 모든 문학 텍스트는 시간을 현재화함으로써 오늘의 시대 안에 내재된 전언, 상징들, 전형성을 드러낸다. 당대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는 것과 같다. 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학-책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대화와 소통의 거점 장소이다. 대화는 문학-책 속에 숨은 수없이 많은 선들을 따라가며 이루어진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를 하기 위해서이다. 지식의 전체상에 접근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의 총량을 키워야 한다. 사진은 교보문고 광화문점 인문예술코너 쪽 서가.
교보문고 제공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성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소설들은 저마다의 선들을 그으며, 혹은 다른 선들을 끌고 뻗쳐간다. 어디로? “바로 저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김연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소설을 읽는 일은 그 선들을 따라 세계의 끝까지 가보는 일이다. 침강하려는 문학 지형을 뚫고 마그마처럼 분출해서 새 지층을 만들려는 욕망이 한국문학 내부에서 들끓고 있다. 그 내용은 변경, 그 경계 위에 선 인물들의 이야기, 즉 시대라는 거대한 프로펠러가 거칠게 돌며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그 밀어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중심에서 저 변두리로 밀려나간 개별자들의 하염없이 고단한 삶을 그린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룰 것이다.


“여기는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한 시간이요, 여기는 그 고향이다”(릴케, ‘두이노의 비가’). 시가 태어나는 지점은 여기다. 시는 삶을 통찰하지도 않고, 언어의 불가능성과 싸우지도 않으며, 다만 그것들을 넘어간다. 그것은 즐거움과 영광의 희미한 기억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토록 비효용적인 시의 운명은 어떨까. 풍부한 감각의 환유들을 밀고 나오는 시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룰 것이다. 백지의 심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정념들이 환유적 상상력을 입고 시로 솟구친다. 주체의 욕망을 동력 삼아 춤추는 시들. 악의 무한 속에서 그걸 견디기 위해 동화와 멜랑콜리를 섞고 비벼 만든 시들. 또 한편으로 웃음의, 울음의, 생태주의 시들. 이것들이 한데 얼려 춤춘다. 바야흐로 시들의 백화제방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은의 연작시집 ‘만인보’의 완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스무 해가 훌쩍 넘도록 고은은 ‘만인보’에 매달렸다. 고은의 시적 상상력은 표류와 표착으로 이루어진 도상학(圖像學)을 펼쳐낸다. 고은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지평 위에서 탐미주의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선(禪)으로, 선에서 사람으로 변전한다. ‘만인보’는 만인이라는 개별자의 삶과 체험을 하나의 점으로 찍고 그 점의 군집들로 한 시대의 웅장한 벽화를 만드는 작업이다.‘만인보’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판단은 엇갈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만인보’는 역사적 진실을 담보한 개별자의 삶을 한 편 한 편 살려냄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품은 저 유적(流謫)의 시간들을 공간화하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반(反)-기억과 싸우는 일이다. 기억은 단단한 고형물이 아니다. 뇌의 해마 조직 위에 세워진 기억의 성채들. “우리의 해마 뉴런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며, 마음은 끊임없는 환생 상태에 있다.”(조나 레러) 기억들은 종유석(鐘乳石)처럼 자란다. 기억들은 자라고 기이하게 제 형체를 비틀며 변형시킨다. 경험과 오류들과 환영들이 뒤섞여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푸는 게 기억이다. 기억은 부풀고 시들고 부스러진다. 그게 거울이라면 표면이 울퉁불퉁한 거울이다. 거기에 비치는 경험이라는 피사체는 늘 비틀려 있다. 변덕스러운 거울이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기억의 뿌리까지 속속들이 파고들 때까지 깊게 물어라. 그리고 기억들이 빛, 비전, 새로운 발견들을 내놓을 때까지 결코 물고 있는 것을 놓지 말라. 독서인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책읽기의 최종 목적이 지식의 습득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사유를 하는 것! 책읽기를 통해 지식의 전체상에 접근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을 통섭할 수 있는 사유의 총량을 키워야 한다. 그럴 때 읽는 행위의 능동성은 뇌의 회로를 새롭게 여는 수단이 되고 사유의 복잡성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지식과 지식들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사유의 불꽃들과 함께 타오르며, 즉 책읽기의 열락을 사유의 향연으로 바꿀 때, 그리하여 독서의 총량을 지렛대 삼아 지식생산자로 나설 때 비로소 진정한 독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정한 독서인만이 자기를 넘어서서 초인류로 거듭날 수 있다. 책을 바탕으로 책을 가로질러서 책 너머로 가기.

이불 한쪽에서 미래가 기척을 하니까 다른 쪽에서 과거가 들썩이며 바람이 인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는 한 이불 속에서 동거한다. 그렇다면 현재는 이불과 그 속에 뉘인 몸을 하나로 뭉뚱그려 현재로 인식하는 의식 그 자체다. 현재는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이 없다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는 항상 현재 안에 있다. 현재 안에 이미 있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거나 균질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충분치 않거나 균질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그것을 충분하게, 혹은 균질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문학은 현재 안의 미래를 선취하는 행동이다. 문학이 죽었다고 말해지는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문학을 구명보트와 같이 붙들고 그것에 내 생을 의탁해서 시대를 가로질러 미래로 나아간다. 내가 오늘도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가는 이유는 자명하다. 거기에서 지식의 최전선과 만나고, 문화와 소통의 현장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바로 거기에서 진리의 수원지(水源池)를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폴드만, ‘독서의 알레고리’, 이창남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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