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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건설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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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3-18 19:02:42 수정 : 2011-03-18 19: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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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영화에 익숙 日참사 불감증
예술이 생명의 존엄성 일깨워야
일본 열도에 밀어닥친 쓰나미를 영상으로 대하면서 의외로 충격적이지 않고 담담해지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할리우드에서 무수하게 제작해 내는 재난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런 장면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아, 저렇게 재앙은 우리 삶을 쓸어가 버리는구나. 그 다음 수순의 충격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지반이 내려앉을 것이고, 지상에 세워진 문명이 아틀란티스의 신화처럼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눈이 내려 지구를 하얗게 뒤덮어 버릴 수도 있고, 지하의 용광로가 솟구쳐 올라 불바다를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염병이 퍼져 인간이 좀비로 변하고, 인간이었던 존재가 나무토막처럼 부서져 도시 곳곳에 쓰레기 더미처럼 쌓일지도 모른다. 

이윤택 영산대 교수·극작 연출학
지구는 어느 덧 인간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하고, 살아남은 인간은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갈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가상현실은 망상이 돼 버린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남게 돼 있다. 영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영웅은 정신적 공황에 빠져 버린 인류를 슈퍼맨의 능력으로 구원하게 돼 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하게 죽어나가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없다. 한두 사람의 영웅 탄생을 위해 그들은 그렇게 죽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불어닥친 현실적 재난 속에서 그런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원자로 속에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원전 직원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재난영화에 등장하는 슈퍼맨의 능력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도전은 영화처럼 해피 엔딩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재난영화를 통해 순간적으로 아찔한 위기와 공포감에 휩싸이지만, 영웅이 존재하기에 일순간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의존하게 되고, 급기야 엄청난 재난을 맞이하면서도 재난의 현실적 공포와 충격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재난을 가상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은 재난에 대항하는 불굴의 정신성을 잃어 버리게 마련이다.

영웅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건 인간의 공포감을 최대한 이용한 영화 속의 가상현실에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웅은 없고, 미래는 결코 해피 엔딩을 보장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나 자신이란 이름의 개인뿐이다. 재난영화에서 무수하게 죽어나가는 익명의 개인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 주어야 하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적극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 이상 한두 사람의 영웅 탄생을 위해 영화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영화야말로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쓰레기다.

근래 부쩍 세기말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오락물이 활개치는 세상이 돼 버렸는데, 바로 이 세기말적 오락물이 인류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독극물이 될 수 있다. 재난이 현실적 위기로 다가올수록 인간은 더욱 개인에 대한 존엄성과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 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인 서로 간의 관심과 소통을 통해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두 사람의 영웅에 의해 구원받는 가상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개인과 개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 엄청난 공동체의 이름으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불굴의 정신성을 회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21세기의 문화예술이 담당해야 할 궁극적 방향은 여기에 있다. 시인은 더 이상 절망적인 끄적거림을 걷어 치우고 생명의 시를 써야 한다. 연극은 회의적인 무대 색감에 구원의 빛을 던져라. 영화는 세기말을 더 이상 팔아 먹지 말고,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를 ‘시네마 천국’처럼 펼쳐 주었으면 한다. 이제 건설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다.

이윤택 영산대 교수·극작 연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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