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시내를 거닐다 보면 거대한 세트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퇴락한 건물과 1950∼60년대에 생산된 미국자동차들이 여전히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은 시간을 거스르는 초현실주의 풍경이다. 고물 자동차들이 폐차되지 않고 여전히 굴러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민박집 이웃에 사는 청년이 자동차 자랑을 늘어놓기에 그의 집 구경에 나섰다. 집 안엔 미니 카센터를 방물케 할 정도로 수리공구가 다 갖춰져 있다.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수동 공작기계도 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부품은 자급자족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뭐든 만들어 쓸 수 있다고 우쭐댄다.
최근 들어선 관광객용으로 들여온 중국산 버스와 한국산 승용차들을 거리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 아바나 외곽을 돌아보기 위해 자동차를 빌렸는데 중국산 자동차다. 한국산 자동차보다 대여료가 훨씬 저렴하다. 한국 차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누 칫솔 등 기본 생필품을 팔고 있는 중년여인. 공산품이 풍족하지 못한 쿠바의 현실을 엿보게 해준다. |
길거리를 여전히 누비고 있는 1950∼60년대 승용차들. 최근 들어 중국차나 한국차들이 들어오면서 차츰 사라지고 있다. |
트럭을 개조해 만든 아바나 시외버스. 아바나 시민들이 인근 소도시로 이동할 때 주로 이용한다. |
교육비가 많이 드는 의대도 쿠바에선 학비가 무료다. 대신 의대 졸업 후 외국(주로 중남미 지역)에 나가 2년간 근무해야 한다. 쿠바 외화벌이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의무복무를 마친 이들에겐 아파트 특별분양 혜택이 주어진다. 고립된 쿠바가 나름대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쿠바의 유일한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호세 마르티 동상이 세워진 아바나 중앙공원 앞의 ‘그림 나무’. 카스트로 80회 생일 때 31명의 쿠바화가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
길거리 무명화가가 그린 화려한 원색의 ‘미인도’. |
‘관타나메라’는 쿠바 동부의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리랑처럼 쿠바에서는 제2의 국가로 불린다. 쿠바 민중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다.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서방에 알려졌다. 1966년 보컬그룹 ‘샌드파이퍼스’는 어쿠스틱 기타가 잔잔히 깔리는 노래로 대히트를 쳤다. 관타나모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의 대가로 미국에 내준 뒤 지금은 쿠바 속 미국으로 알카에다 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곳이다.
호세 마르티 |
마르티는 6개월의 수형생활 끝에 스페인 유배길에 오른다. 스페인에서 쿠바 이민자들의 가정교사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마드리드와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멕시코로 이주한 마르티는 ‘오레스테스’라는 필명으로 여러 신문사에 사설과 시를 기고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쿠바에서 스페인 식민정부가 정치적 추방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자 마르티는 1878년 아바나로 돌아와 변호사와 사립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각종 모임에서 쿠바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비판을 가하면서 스페인 식민지 정부에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80년 마르티는 결국 미국 뉴욕에 도착하게 된다. 쿠바혁명당을 조직하여 해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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