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치기 위해 조선 길 빌려”
‘정명가도’로 전쟁 명분 내세워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년이 되는 해다. 임진왜란은 전쟁 당사국과 주변국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청 교체를 불러일으켰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몰락을 재촉했다. 전쟁이 미친 영향에 대한 공감과는 달리 전쟁의 원인과 실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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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사천해전 기록화. 바다의 전쟁을 진두지휘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영웅으로 평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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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호랑이를 창으로 사냥하는 그림인 조선군기(朝鮮軍記)로 19세기에 간행됐다. 호랑이로 상징되는 조선의 무력을 가토 기요마사가 누른다는 상징적인 장면을 담았다. |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한국 역사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당시 일본 지배자들의 정치적 의도에 주목해 오고 있다. 일본 지배세력이 내부의 알력과 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로 설명해 왔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린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일본 어용 역사서로, 종전 이후 에도 막부시대에 작성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보’(1658)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사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아들이 요절한 뒤 슬픔에 잠겨 있던 그가 조선 출병을 선언하는 부문에서다.
“슬픔이 나의 목숨을 갉아먹을 듯하구나. 대장부가 어찌 백 년 인생을 이처럼 헛되이 끝낼 수 있으랴! … 명나라를 치기 전에 우선 조선을 정벌할 것이다. 예부터 중화는 우리나라를 여러 번 침략했으나 우리나라가 외국을 정벌한 것은 진구코고(神功皇后)가 서쪽 삼한을 정벌한 이래 천 년 동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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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간행된 고명합전기(高名合戰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는 그림으로, 일본의 장군이 외국에서 후지산을 본다는 의미는 그 지역이 일본의 영역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다. |
김 교수는 “일본이 침략국이지만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한 시각은 독도와 일제 35년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이만큼이나 넓다”며 “일본의 시각을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라 일본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대처하기 위해서도 임진왜란에 대한 그들의 기록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들의 기록들 위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각종 기록에서 ‘조선 침략’을 ‘정벌’이라고 거의 매번 옹호하지만, 외국의 일본 ‘정벌’은 부당한 침략으로 서술했다. 일본은 고려시대 몽골과 고려의 일본 정벌이 침략의 과정이었고, 임진왜란은 이를 되갚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 왔다. 이 와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징비록’과 ‘이순신’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입된 18세기 이후 이순신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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