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소설가 |
함경도의 유학자 가문 출신인 그는 약관 20세에 등단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연희전문을 수석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해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8·15 광복 후 미군이 진주했다. 그가 유학 시절 경험한 미국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민주국가였다. 그는 미국이 조국을 그런 나라로 건설해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미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정청 여론국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실망했다. 그는 미국이 이 나라를 진정한 민주국가로 만드는 일보다 군사기지 고착화에 열중하고 이승만의 독재를 옹호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저항시인이 됐다. 탄압을 받자 공산당 조직에 들어갔고 6·25전쟁 중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휴전회담에 통역장교로 참석했으며 헝가리 종군기자 티보 메러이와 우정을 쌓았다. 메러이 기자에게 남에서 환멸을 느껴 북으로 왔는데 여기도 똑같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런 북한의 환멸과 타협하지 못해서일까. 그는 1953년 이승엽, 조일명, 임화, 이강국 등 13명과 함께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행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시인의 생애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났다. 북한에 간 뒤의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메러이 기자가 프랑스 파리의 한 잡지에 기고한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이라는 글이 1962년 ‘사상계’에 실리면서 남한에 알려졌다.
민족사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태평성대도 있지만 성난 파도가 모든 것을 휘감는 위기의 시대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설정식 같은 최고의 인텔리겐치아(지식층)도, 문맹 수준의 민초도 차별 없다. 그러나 상황을 인식하는 아픔은 인텔리겐치아가 더 클 것이다. 설정식의 시와 소설을 읽으면 그걸 느낄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필자는 설정식의 생애를 소설로 쓰려고 창작노트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의 삶이 최인훈 선생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남쪽과 북쪽에 모두 실망한 환멸 모티브에 걸맞은 극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자료를 찾았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가 헝가리와 수교하자 서울 주재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했고 메러이 기자와 연락이 닿아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메러이 기자는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설정식은 순수한 양심을 가진 시인이었습니다. 젊은 날 한국에서 그를 만난 경험은 내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필자는 소설을 시작도 못하고 말았다. 그의 생애 자체가 소설보다 더 극적이어서 섣부른 상상력으로 덧칠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설정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미군정의 고위직에 앉았다. 많은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과 타협했으면 남한 정부에서 장관쯤은 했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타협했으면 살아남아 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었다. 전집에 실린 작품들이 그것을 서사구조로 담고 있진 않지만 그의 정신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는 분단의 역사에 희생된 양심적인 시인의 표상이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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