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뒤에 고종석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로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술’을 꼽았다. 김수영과 고종석이 꼽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오히려 다름과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다름과 차이는 두 사람의 말-살이와, 그 말-살이를 품었던 시대가 그토록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다름과 차이는 개인의 취향과 편견의 차이, 그들의 언어적 미감을 주조했을 계급과 출신지역의 다름을 드러낸다. 언어에 대한 고종석의 각별한 애정은 두드러지는 그의 특징 중의 하나다. 그는 한국어, 더 나아가 언어 보편에 대한 관심이 깊고, 언어가 어떻게 삶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지에 대해 사유하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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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은 “자유주의 사회는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그 차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 1993)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소설을 쓰고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에세이와 칼럼 등을 썼다. 그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날 때는 에세이스트일 때다. 달리 말하면 그의 책들 중에서 형식의 구애 없이 사유의 내용을 자유롭게 적어 낸 책들이 가장 좋았다는 뜻이다. 내 서가에는 그가 지은 스무 권쯤 되는 책들이 한 줄로 나란히 꽂혀 있다. ‘제망매(祭亡妹)’(문학동네, 1997),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2003),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 ‘국어의 풍경들’(문학과지성사, 1999),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2006), ‘고종석의 여자들’(개마고원, 2009), ‘어루만지다-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마음산책, 2009),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2006), ‘독고준’(새움, 2010), ‘서얼단상’(개마고원, 2010),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 ‘언문세설’(열림원, 1999), ‘바리에떼-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 1997), ‘도시의 기억’(개마고원, 2008), ‘경계긋기의 어려움’(개마고원, 2009),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6),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2007). 이 목록을 보니 그의 책들이 나올 때마다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며 읽었음을 알겠다. 서가 어딘가에 이 목록에서 빠진 책이 한두 권 더 있을지도 모른다. 대개는 사 보았고, 더러는 그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 보내주어 읽었다. 어쨌든 나는 고종석의 열혈 독자다.
고종석의 문장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가 쓰는 한국어 문장은 우아하고 견실하다. 아울러 어휘를 골라 쓰는 데 섬세하고 정확하다. 그는 대개의 사람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한 뜻으로 두루뭉술하게 쓰는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굳이 분별해서 쓸 것을 제안한다. “일상적 화용 맥락에서 언어를 가리킬 때는 ‘한국어’로, 문자체계를 가리킬 때는 ‘한글’로 구별해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감염된 언어’) 그는 누구보다도 한국어 통사 체계 안에서 제 생각과 느낌들, 더러는 의표를 찌르는 통찰과 지혜를 화사하게 펼쳐내는 사람이다. 특히 정치에 대한 제 의견을 담백하게 담아내는 고종석의 정치 칼럼들은 이녁들이 엄벙덤벙 가리산 지리산 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또렷하다. 늘 뜻이 새긴 듯 분명하고 균형잡힌 것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유의 냉철함과 그것을 싣는 언어의 적확한 표현보다는 특정 정치 이념을 흠모하고 섬기는 정열이 지나쳐 제 한 몸을 던지는 것을 기꺼워하는 열혈 이론가들이 득세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울러 가끔 그의 글에는 촌철살인의 유머가 담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대한민국에서 ‘한국’이라는 말보다 ‘조선’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건 ‘조선일보’와 한총련 내의 주사파밖에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법적·역사적 정통성을 확고히 믿고 있는 나로서는 철딱서니 없이 ‘조선의 청년’을 자임하는 주사파 학생들도 한심스럽지만, ‘조선’이라는 제호에 그렇게 집착을 보이는 ‘조선일보’도 아주 수상쩍다. (중략) 애국단체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빨갱이 신문을 가만 놔두다니. 정말 나 같은 반공주의자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감염된 언어’) 책에서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다. 2003년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를 선언하여 이목을 끌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고종석’을 저자로 삼은 책들을 부지런히 구해다 읽었을 것이다.
고종석의 이념적 자리는 그 자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영역이다. 그가 제 말과 글의 무게를 두는 쪽은 좌도 우도 아닌, 정치적 올바름의 쪽이다. 얼핏 그와는 달라 보이는 우파적 신념가에 속하는 복거일을 “식민지 체험과 분단상황이 강요한 좌우의 집단주의 편집증을 어루만지며, ‘개인’으로 향하는 좁다란 오솔길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하면서, 그를 자신의 ‘사상의 은사’로, ‘의식화의 원흉’으로 서슴없이 내세울 때, 나는 좀 놀랐다.
고종석은 늘 민족주의적 인력권의 바깥에서 사유하고 글쓰기를 해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복거일이 민족주의라는 지배적 정서에 맞서 꿋꿋하게 ‘개인’을 옹호하고 보편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복거일과 고종석은 닮은 데보다는 다른 데가 더 많다. 복거일은 재벌에 우호적이고, 노동조합에 대해 차가운 입장을 취한다. 노동조합의 독점적 권력이 시장 기능을 마비시키고 노동의 질을 떨어뜨리며 결과적으로 물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는 복거일과 고종석의 생각이 같다. 고종석은 노조가 비판받아야 하듯 재벌도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조가 시장을 경직시키는 것처럼, 재벌 역시 시장을 경직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노동의 공급을 독점해 노동시장에서 경쟁을 제한하는 노조 못지않게, 그룹 내부의 그물과 정치권과의 유착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즉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시장의 몫을 줄여온 재벌도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감염된 언어’)

이때 개인은 ‘민족’이라는 집합 단위에 종속되는 개체로서 보다는 그 무엇에 종속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함 그 자체로 숭고한 개인, 즉 “인류의 기본적 단위로서의 개인,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이다. 아울러 고종석은 생래적 자유주의자다. 그가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감염된 언어’)라고 쓸 때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체의 속박과 책무로부터의 자유주의를 선언하는 것이다. 자유는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가 비판을 통해서, 그것으로 충분치 않을 때 폭력의 수단을 빌려서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유를 위해서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전체주의가 분쇄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양한 사회적 조건의 공존을 허용하고,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그 차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인데, 전체주의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전체주의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가 희귀한 사례는 아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한 대가나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인색하다. 많은 사람이 자유를 거저 누리려고 하지만, 고종석은 기꺼이 그 비용을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만인 대 일인이 맞서는 구조에서도 기꺼이 일인의 자리에 서서 만인의 비난과 폭력을 감수하겠다는 것은 비상한 윤리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발상이다. 그런 면에서 고종석은 윤리적 자유주의자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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