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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길 이야기꾼’ 이한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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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28 15:08:40 수정 : 2012-08-28 15: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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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걷는다…묻는다…이야기를 찾는다
우리가 어디로 내딛는 발걸음은 우리를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가 되게 해 준다. 온몸으로 세상과 맞닥뜨리는 행위다. 그동안 온갖 편리한 교통수단들은 몸이 세상과 마주하는 것을 거세시켰다. 몸의 소외를 가져 온 것이다. 발로 길을 걷는다는 행위는 몸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을 깨우게 해줘 능동적 명상에 빠져들게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걷는 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 이르게 된다.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부질없는 집착도 내려놓게 된다.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은 종교적 순례길이지만 최근 들어 일반인들이 대거 걷는 이유다. 국내에서도 근래 들어 걷는 일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올레길, 둘레길, 누리길, 늠내길, 나들길 등 수많은 길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산도 조금 깎고, 물길도 조금 건드리는 일도 생겼다. 

길은 있는 그대로를 그저 연결하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으련만 일을 잘하려다 보니 자꾸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길은 있는데 그 길 위에 역사도, 지리도, 전설도, 이야기도, 삶도 없다는 점이다.


겸재의 수송동 그림 현장을 찾은 이한성씨. 대학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역사적 자료와 흔적들을 발로 걸으며 꿰어, 길에 이야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 길 위에 이야기를 풀어 놓는 이가 있다. 길 이야기꾼 이한성(63)씨다. 그는 테마별로 길을 엮어 나간다. 길이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입히는 작업이다. 역사와 지리 등 이야기가 숨 쉬는 길이다. 마애불길, 옛절터길, 매향비길, 시와 그림이 있는 길 등이 그동안 그가 엮어 온 길이다.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옛절터길을 찾아 산길로 들어 서면 그는 영락없는 출가승이다. 혹여 낯선 마을에 가서 절터를 물으면 십중팔구 ‘절 지으려고 찾느냐’는 물음이 돌아온다. 그럴 땐 그저 웃으며 본의 아니게 ‘영감 사미승’이 된다. 절터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운수납자가 다 됐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도 1700년이 넘었다. 들리는 말로는 절터가 3000곳은 실히 될 것이라 한다. 그 많은 절터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역사서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지를 뒤져 절 이름과 위치를 찾아내고 있다. 북한산과 남한산의 절터 찾기에는 ‘북한지(北漢誌)’와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가 큰 도움이 됐다. 그것으로도 부족할 땐 ‘범우고(梵宇攷)’를 비롯한 각종 본말사지, 왕조실록이나 향토역사서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물론 한국사찰총서와 종단에서 펴낸 폐사지 조사 보고서도 참고가 됐다. 하지만 위치 정보가 없거나 틀려 있어서 산속을 종종 헤매게 한다. 소요산 소요사와 현암사 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모기에 물리고 뱀에 놀라고 말벌에 쏘여 병원 신세도 졌다. 어느 날인가 자료만 믿고 금방 찾을 것 같아 산 속에 들었다가 해가 떨어져 기어서 산을 내려 오기도 했다. 방향이 어긋난 자료와 산길 표지판이 온종일 그를 산 속에 잡아 둔 것이다. 그럴 땐 그도 인간인지라 육두문자가 절로 나온다.

그에게 이런 일들이 학문을 이루는 것도,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그도 왜 이러고 다니나 하는 생각에 젖는 때가 많다. 그러다가도 우거진 숲 속에서 찾아낸 기와쪽, 자기편, 옛절의 석축은 가슴을 뛰게 한다. 이젠 중독이라 할 수밖에 없다.

옛 지도와 선인들의 산행기인 ‘유산록(遊山錄)’에서만 만났던 절터를 찾아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모든 수고를 일시에 씻어 준다. 게다가 절터를 중심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을 연결하고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역사를 얹으면 그의 ‘옛절터 가는 길’의 한 루트가 완성된다.

시와 그림이 있는 길은 또 어떤가. 겸재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그 배경이 되는 인왕산 북악산길에 이야기가 돼준다.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은 행주산성에서 절두산길에 이르는 한강길의 길동무로 충분하다.

그와 이른 새벽 인왕산길에 동행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화제가 됐다. 1447년 안평대군이 도원경(桃源景)을 꿈꾼 곳은 인왕산 수성동의 비해당(匪懈堂)에서였다. 옥인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사저다. 아버지 세종이 시경의 증민편 말씀을 빌려 ‘새벽부터 밤까지 게으르지 말고 한 사람을 섬기라(夙夜匪懈 以事一人)’고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었다. 풍류객으로 많은 사람을 주위에 몰고 다녔던 안평대군에게 아마도 딴마음을 먹지 말라는 경계가 담긴 듯하다.

안평대군이 비해당에서 도원경을 꿈꾸고 현동자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몽유도원도다. 3일 만에 완성된 그림에 안평대군이 제(題)와 발(跋)을 붙이고, 21명의 선비가 제찬(題讚)한 그림이다. 안평대군은 4년 후 창의문 밖 백련봉 아래 골짜기에서 자신의 꿈 속 풍경을 방불케 하는 숲과 물과 언덕을 찾으니 그곳이 무계동(武溪洞·무릉도원과 같은 골짜기)이었다. 이곳에 지은 별서(別墅)가 무계정사(武溪精舍)였다. 안내판엔 무계정사에서 안평대군이 도원경의 꿈을 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잘못된 것이다.

창의문 밖 무계동에서 인왕산길을 걸어 비해당으로 가는 안평대군의 길, 안견의 길을 그와 함께 걸었다. 비해당 터에 있던 옥인아파트는 지금은 철거되고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됐다. 두 개의 장대석을 꾸밈없이 걸친 기린교(麒麟橋)가 오랜 시멘트 범벅을 벗고 산뜻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수송동(水聲洞) 그림 속에서도 기린교가 완연하니 옛 친구처럼 반갑다.

민화를 연상시키는 인왕산 산신 부조.
길 이야기꾼으로 그는 서울 근교에 무수히 많은 마애불과 마애상에도 관심이 많다. 인왕산에도 남녘에 3분, 북녘에 3분 등 모두 6분의 마애불이 있다. 석불도 있다. 북한산에도, 관악산에도, 불암산에도, 수락산에도 구석구석 마애불이 숨어 있다. 이런 마애불이 자리 잡은 길에는 전설과 역사도 심심치 않게 남아 있다. 그는 이런 길을 걷지 않고 어떤 길을 걷느냐고 반문했다.

100년 전, 200년 전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정성이 깃든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마애상들도 있다. 평창동에서 보현봉 가는 길에서는 마애불 한 분, 마애칠성님 부조, 북한산 산신 부조를 만나게 된다. 민간신앙(산신신앙, 칠성신앙) 자료로서는 더 없이 귀중한 것들이다.

매향비(埋香碑)가 있는 바닷가 마을, 섬마을을 찾아 산길과 바닷길을 걷는 일은 고려와 조선 초 이 땅에 살다 간 민초들을 만나는 길이다. 일찍이 침향에 대한 기록은 고성 삼일포 매향비를 통해 알려졌다.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한 겸재의 ‘신묘년 풍악도첩’에도 총석정 옆에 비석을 그리고 매향비라고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1970년대 이후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바닷가와 도서지방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매향비는 12기에 이른다. 암울한 현실과 미래가 없었던 민초들이 메시아(미륵불)를 기다리는 바람으로 매향(埋香, 沈香·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뻘에 향나무를 묻어 두어 세월이 가면 침향이 된다는 믿음으로 나무를 묻은 일)을 했다. 메시아가 강림할 때 피울 공양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역마살의 운명이라 했다.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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