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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1〉 진주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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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01 20:30:51 수정 : 2013-01-01 20: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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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파, 고려 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 지낸 정예가 시조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다른 말로 진양정씨(晉陽鄭氏)라고도 한다. 진양이 1995년 진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주정씨로 명명되고 있다. 진주정씨는 신라 건국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지백호(智伯虎)를 원시조로 한다. 하지만, 지백호 이후의 계대가 밝혀진 바가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진주정씨에는 뿌리가 다른 여덟 계통의 정씨가 있다. 이를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따르면,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는 8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4개 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 그것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계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에서부터 계대가 확실해 정시양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는 진주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자우이다. 그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 파, 8세손인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누어진다.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시조는 정장이다. 정장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인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

정헌계(鄭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통으로 이뤄진 진주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정척(鄭陟)·정성근(鄭誠謹) 등 2명의 청백리를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7만4777가구에 23만8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진주정씨 충장공파인 정신중, 아들 정이오, 손자 정분 등 3대 묘가 있는 진주시 상대동 고분.
진주정씨의 갈래와 내력

첫째, 진주정씨 충장공파는 고려 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정시양을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정시양의 7세손 정수(鄭需)는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충장공파의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의 후손 정을보(鄭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역임했으며, 후에 청천군에 봉해지고, 찬성사에 올랐다(공민왕).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정신중(鄭臣重)의 아들 정이오(鄭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정분(鄭?)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했다. 그의 사후 영조 때 가서야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복권되었다(영조 22). 정조 때에는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 충신단에도 배식(配食)되었다. 순조 때에는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충장공 정분이 배향된 전남 장흥의 충렬사. 정분은 세조가 왕위찬탈을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후 사사되었다.
은열공파 정신렬을 제향한 진주 촉석루 내 청계서원.
둘째, 은열공파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정자우의 후손이다. 그의 6세손 정신열이 고려 현종 때 천거되어 여러 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선주지사 정임덕(鄭任德)의 아들 정유(鄭愈)와 정손(鄭孫)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정천익(鄭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기 하남에 있는 진주정씨 공대공파 정척의 묘역.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정장을 파조로 하는 공대공파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정척이 뛰어났다. 정척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에는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편찬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은 성종 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문 밖에 나와 왕명을 받지 않자,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3년 상을 치렀고,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승문원 박사 정주신(鄭舟臣)은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고, 아우 정매신(鄭梅臣)과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기(鄭元麒), 정매신의 손자 정효성(鄭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에 걸쳐 6명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남 광양군으로 피란했다가 정착한 정대유(鄭大有)와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광양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우공공파 시조 정온이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고자 지은 우곡정.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정온(鄭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그는 대사간을 역임하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의 10세손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주축을 이뤘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다섯째, 정자우의 후손이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15세손 정기룡이 유명하다. 그는 초명(初名)이 정무수(鄭茂壽)였으나, 나중에 정기룡(鄭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상주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성주·합천·초계·의령·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 데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정신(鄭侁)을 시조로 하는 지후공파(祗侯公派),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하는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등이 있다.

진주정씨의 인물들

▲충장공파에서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에 오른 시조 정예가 있으며,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을보는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문영공(文英公) 정수는 대제학을 지냈고, 문영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정수규는 정당문학을, 정천귀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충장공 정분은 정이오의 아들로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나,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은열공파에서는 시조 정자우가 고려 때 호장을 지냈으며, 6세손인 정신열은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침공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때 정천익은 사위인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자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자우의 후손으로 첨정을 지낸 정중공은 첨정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정기용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공대공파에서는 시조 정장이 고려 말에 통정첨지를 지냈으며, 4세손 정척은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다.

▲어사공파에서는 시조 정헌이 고려 말에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온(우곡)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고, 우곡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정택은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내, 어사공파를 이었다. 정택의 10세손 정경세는 조선조 대제학을 지내고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파를 대표한다.

그외 지후공파의 시조 정선은 고려 때 지후에 올랐으며, 내부사공파의 시조 정안교는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냈다.

진주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일형(유엔총회 한국대표, 국회의원, 외무장관, 신민당부총재) 박사와 그의 아들 정대철(국회의원)이 있으며, 그외 국회의원으로 정세환 정헌주 정준 정상용 정균환 정동호 정상열 정갑주 정재완 정순덕 등이 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상천 변호사도 진주정씨이다. 또한 법조계에서는 정기승(대법판사), 정창운(검찰총장)과 변호사로 정덕기, 정창훈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원식 총리가 있으며, 정정환(부산대 대학원장), 정운오(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정재환(법학박사, 동아대 총장), 정수봉(법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재각(문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동규(약학박사, 숙명여대 약대 학장), 정요한(이학박사, 조선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정주영(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정재구(제일제당 사장)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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