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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4> 압해정씨·나주정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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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3-05 18:24:17 수정 : 2013-03-05 18: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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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성, 당 선종 때 직언상소 노여움 받아 전남 압해도로 유배됐다 생 마쳐…
정윤종, 나주정씨의 시조…고려 때 대장군, 6세대까지 압해를 중심으로 세거
정약용, 조선실학의 거두…17년간 유배생활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500여권 저술
정극인, 영광정씨… 단종 때 급제 사간원 정언, 세조 때 낙향… 최초 가사 상춘곡 지어
압해정씨는

우리나라 정씨에는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두 정씨가 있다. 하나는 나라이름정(鄭)자를 쓰는 정씨이며, 다른 하나는 넷째천간정(丁)자를 쓰는 정씨이다. 우리나라 정씨 중 대부분의 정씨는 나라이름정(鄭)자를 쓰고 있으나, 당나라 출신인 정덕성(丁德盛·대양군)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 정(丁)씨가 있다. 이를 압해정씨(押海丁氏)라고 하는데, 후대에 나주정씨(羅州丁氏)·영광정씨(靈光丁氏)·의성정씨(義城丁氏)·창원정씨(昌原丁氏)로 분관되었다.

정(丁)씨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덕성이 나온다. 정덕성은 당나라 등주(鄧州)의 정영(丁營)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한 후 문종 때 대승상에 오르고, 무종 때 대양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선종 때 직언 상소한 것이 노여움을 사 아들·손자 등과 함께 지금의 전남 신안 압해도에 유배되었다. 후에 당나라에서 죄를 사하고 입조하라고 하는 칙서가 왔으나, 노약한 몸을 이끌고 돌아갈 수 없어서 압해도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압해정씨라고 정하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丁)씨의 연원은 중국이다. 중국에서 정(丁)씨가 생겨난 연원을 따지면 3000년 전 주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의 첫 번째 제후가 강태공의 제나라였는데, 그 아들인 급(伋)의 시호(諡號)가 정공(丁公)이었다. 그 이후 그의 지손(支孫)들이 정(丁)씨를 성(姓)으로 삼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정(丁)씨를 제양당(齊陽堂) 정(丁)씨라 칭하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은 정덕성을 도시조로 하는 압해정씨의 연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관계에 대한 고증이 어렵다’며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경기 남양주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뒷산에 정약용 선생 묘역이 있다.
어찌 되었든 전남 신안의 압해면을 본관으로 삼은 압해정씨는 고려 말에 왜구의 잦은 출몰로 일가가 나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때에는 압해도가 무인도가 되어 폐현이 되었고, 압해정씨는 본관을 나주압해정씨로 쓰다가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나주정씨로 고쳐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갈라져 나간 본관이 영광정씨·의성정씨·창원정씨 등이 있다.

현재 나주·영광·의성·창원을 본관으로 쓰는 정(丁)씨는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모두 18만79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나주정씨는 8만2863명, 영광정씨는 2만1774명, 의성정씨는 2951명, 창원정씨는 1만6141명 등이다. 

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나주정씨 유래비.
정(丁)씨의 갈래와 유래

나주정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검교대장군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이다. 나주정씨의 씨족보를 보면 검교대장군 정윤종의 상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씨족통보 등에는 나주정씨의 대조(大祖)는 대양군 정덕성으로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 정윤종에서 6세까지는 압해를 중심으로 세거해 오다가 7세 정원보(丁元甫) 대부터 개성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또 정원보의 손자인 정안경(丁安景)의 대에서는 황해도 백천 지방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평양과 원주, 충북 음성, 경기 고양·광주, 전북 전주, 경남 창녕, 경북 안동 등으로 옮겨서 살아왔다.

나주정씨는 조선조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정수강(丁壽崗)이 병조참판(성종)을, 그의 아들 정옥형(丁玉亨)과 정응두(丁應斗) 부자는 좌찬성을 지냈다. 또한 정응두의 네 아들(윤조·윤희·윤우·윤복)은 모두 지방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며 명문가문으로 성장했다. 또 숙종 때 ‘우담집(愚潭集)’을 낸 성리학자 정시한(丁時翰), 영조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정범조(丁範祖)도 나주정씨이다.

하지만, 나주정씨 문중에서 가장 큰 인물로는 조선 실학의 거두인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7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그중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여유당전서’ 등이 유명하다. 이렇게 나주정씨는 조선왕조에서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며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 나주정씨는 교리공파·문화공파·전첨공파·고암공파·초암공파·도헌공파·통정공파·첨정공파·기옹공파·부사공파·덕천파·사간공파 등이 있으며 인구는 8만2863명(2000년)이다.

영광정씨는 다른 이름으로 영성정씨(靈城丁氏)라고도 한다. 영광의 옛 이름이 영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은 본관을 다르게 쓰고 있다. 영광정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에 태학생원(太學生員)을 지낸 정진(丁晋)인데, 그의 손자인 정찬(丁贊)이 공민왕 때 영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영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영광정씨 인물 중에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부사직을 지낸 정곤의 아들이다. 단종 원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이 왕위를 뺏기자 관직에서 물러나 전북 태인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문학 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저서로는 ‘불우헌집’이 전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 이동백·송만갑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여 근대 창극을 정립하는 데 기여를 한 정정열도 영광정씨 사람이다.

영광정씨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총 37명이다. 2000년 현재 총 2만1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정(丁)씨 중 나주정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영광정씨의 주요 파는 훈련공파·함열공파·불우헌공파·호군공파·사정공파·서윤공파·생원공파·부사공파·마산공파·총랑공파·상호군공파·옥과공파·참봉공파·훈도공파 등이 있다.

의성정씨는 영광정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압해정씨 도시조인 대양군 정덕성의 23세손인 정영손(丁令孫)은 공민왕 때 경산부사(京山府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그 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기에 그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정씨에는 판서공파(判書公派)·야은공파(野隱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등이 있으며,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9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창원정씨는 선(先)창원파와 후(後)창원파로 나뉜다. 선창원파의 중시조는 정연방(丁衍邦)으로, 그는 상호군을 지냈다. 그의 계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덕성의 손자 정응도와 고려 때 의창(창원의 옛 이름)군에 봉해진 정필진이 있다.

후창원파의 중시조 정관(丁寬)은 고려 공민왕 때 공신이 되어 창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창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창원정씨의 인물로는 중종 때 정환(丁煥)·정황(丁黃) 형제가 있으며, 정춘(丁春)·정대수(丁大水) 등이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다. 정황은 인종의 장례 때 예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하다가 정미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창원정씨의 주요 파는 선창원계에서 부승공파·노위공파·사정공파가 있으며, 후창원계에서는 직장공파·현령공파·창랑공파 등이 있다. 2000년 창원정씨의 총인구는 1만6141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나주압해정씨의 도시조인 정덕성의 묘
압해정씨의 연혁과 인물


나주정씨에서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자급(丁子及)과 그의 아들 정수강 대에서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정수강은 벼슬이 형조판서·병조판서·예조판서를 두루 거치며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로는 정응두가 있으며, 이 역시 관찰사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정응두의 네 아들 모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첫째 정윤희(丁胤禧)는 퇴계 이황에게서 글을 배우고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동생 정윤복(丁胤福)은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 외 동생들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리학자로 정시한의 이름이 높았고, 그의 증손인 정범조는 영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제학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해좌집(海左集)’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
나주정씨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다. 그는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윤선도의 후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이 높았으며,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저서를 접하며 실학에 관심을 가졌다. 28세에 급제한 후 정조 때 형조참의를 지냈다.

하지만, 신유박해·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17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귀양살이하는 동안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丁若銓)은 ‘영남인물고’ 등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을 썼다. 그 후 신유박해 때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자산어보(玆山魚譜)’ ‘논어탄’ ‘송정사의’ 등을 집필했다.

정약종(丁若鍾)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교에 힘을 쓰다가 신유박해 때 옥사하였다. 그의 아들 정하상(丁夏祥)도 조선대리감목구 설치를 요청하고 서양의 신부를 받아들이는 등 전교에 힘썼으나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후손인 정의배도 대원군의 병인교난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나주정씨에서는 가문의 명성을 빗대 ‘9대 옥당’이라고 이야기한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들만 들어갈 수 있는 벼슬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9대 옥당이라는 말은 그만큼 정씨 집안에서 문장과 도덕을 겸비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벼슬을 9대에 걸쳐 지냈다는 뜻이다.

창원정씨에서는 정환·정황 형제가 유명하다. 둘은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중 정황은 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형조·이조의 정랑을 거쳤다. 또 정춘(丁春)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산·거제·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영광정씨에서는 정극인이 유명하다. 그는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을 거쳤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북 태인으로 낙향했다. 그는 문학에 특출했는데, 조선 최초의 가사인 ‘상춘곡’이 그의 작품이다.

의성정씨에서는 정자위(丁子威)가 판예빈시사(빈객의 연향과 음식 공궤를 관장한 관청)를 역임했고, 정숙위는 부사를, 정현(丁炫)은 판서를 역임했다. 정재명은 대사간을 거쳐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나주압해정씨 분향소인 추원재.
압해정씨의 현대 인물

압해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일권(전 국회의장), 정래혁(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정시채(전 농림수산부 장관), 정세균(전 산업자원부 장관, 민주당 대표), 정세현(전 통일부 장관), 정장현(전 국회의원), 정명섭·정대천·정규상·정영희·정해걸·정해남 등 전·현직 국회의원, 정해식 전 충북지사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정득규 전 전남대 총장, 정명헌 전 조선대 약대학장, 정병휴 전 조선대 총장 등이 있으며, 정만길(전 광업진흥공사 사장), 정달용(전 대구은행장), 정규수(삼우EMC 회장) 등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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