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중국의 성씨는 대개 삼황오제 중 염제신농(姜)씨 계통과 황제헌원(姬)씨의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염제신농씨 계통의 강씨는 약 600만명 정도가 된다. 강씨 외에도 고(高)·노(盧)·여(呂)·허(許)·구(丘·邱)·강(强)·방(方)·정(丁)·장(章)·사(謝)·제(齊)·하(賀)·향(向)·가(柯)·뢰(賴)·초(焦)·기(紀)·최(崔)·좌(左)·역(易)씨 등이 갈라져 나갔다. 우리가 잘 아는 치우천황이나 요순시대 제후 강백이(姜伯夷·조죽국 왕자 백이숙제와는 다른 인물), 제나라의 제후가 된 강태공 등이 강씨에 속하며, 최초로 중국을 천하통일하고 황제에 등극한 진시황도 진나라 왕실의 성씨인 영(嶺)이라는 설과 함께 여불위의 자식이기 때문에 여(呂)씨라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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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의 신도비각과 묘. 경기 시흥시 연꽃마을에는 강희안·강희맹·강구순 등의 묘와 이들을 기리는 연성재가 있다. |
이렇듯 강씨는 현존하는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원을 갖고 있다. 강백이, 강백이의 37대손이 강태공이다. 그중 강태공은 현존하는 강씨의 실질적인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본명은 강상(姜尙)이고, 본관은 천수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때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들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그중 최초로 중국을 천하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의 여(呂)씨도 강씨에게서 갈라져나간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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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 장군 초상.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의 도시조로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매년 3월에 제향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강씨는 강(姜)·강(康)·강(强)·강(剛)으로 4가지 성씨가 있다. 그중 강(姜)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체 인구는 약 130만(2000년 국세조사)으로 전체 성씨 중 정씨 다음으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 강(康)씨가 신천·재령 등 15개 본에 10여만 명이고, 강(强)씨나 강(剛)씨는 1000명 내외의 소수 성씨이다(2000년 국세조사에서 强씨는 1600여명, 剛씨는 5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렇듯 강씨 중에서는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도시조로 삼고 있다.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으로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이듬해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또 이듬해에 요서(遼西)로 출전하여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과 교전하고,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나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지금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본관이 진주가 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그의 후손인 강진(姜縉)이 통일신라 때 진양후(晋陽侯·진주의 옛이름)에 봉해진 데서 유래한다. 일설에는 강이식 장군의 8세손인 강우덕(姜友德)이 고구려 멸망 후 진주로 이거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강우덕의 부친으로 고려 말 문하찬성사를 지낸 강시(姜蓍)의 아들이며 우왕의 사위였던 강회계(姜淮季)의 형인 강회백(姜淮伯)이 진양(晉陽)에 귀양 간 계기로 진주를 세거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강씨의 본관들은 진주 외에도 금천(衿川)·안동(安東)·배천(白川)·해미(海美)·동복(同福)·광주(光州) 등 여러 본관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모두가 진주강씨에서 분적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각 파를 보면 강이식을 동일 시조로 하여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박사공파(博士公派)가 있고, 강위용(姜渭庸)을 중시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 인헌공파(仁憲公派)가 있다. 박사공파는 어사공파(御使公派)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 한다.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서울 금천구)강씨라고 한다.
진주강씨의 전체 인구는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30만724가구에 총 96만67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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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조어대. 중국 산시성 바오지시(寶鷄市)에 있다. |
진주강씨는 시조를 고구려의 명장인 강이식 장군을 단일시조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강이식 이후 계보에 대해선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아 정확한 계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각 파별로 중시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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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조선 전기 시화로 유명한 강희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
박사공파의 중시조는 강계용이다. 그는 국자박사(國子博士)로 고려 원종 때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의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의 후손은 통정공파(通亭公派)를,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은 통계공파(通溪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통정공파의 파조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개성유수와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강희안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형이 된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은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강회중의 후손인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이 있으며,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있다.
또한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강시영(姜時永)·강문형(姜文馨)·강난형(姜蘭馨)·강우형(姜友馨)·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밖에도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개발한 강홍중(姜弘重)도 통계공파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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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 동상. 관악산 기슭에 있는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후에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박사공 강계용의 아우인 강위용은 고려 때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으며, 진주강씨 가문의 5대 파조로 소감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4대손 강태(姜泰)는 가선대부 대상(嘉善大夫 大相)으로 있으면서 오랑캐의 침입을 당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엎드려 곡하면서 한사코 자리를 뜨지 않자 오랑캐도 감탄하여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전한다.
관서공파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파조로 하고 있다. 그의 조부는 고려 중기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지낸 강원용이며,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한 강기문(姜起文)이 친부이다. 후손들에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렸다. 또 9세손 강행(姜行)은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은열공파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강민첨은 고려 광종 14년에 진주에서 태어났다. 현종 때 동여진(東女眞)이 영일과 청하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또 1018년에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시호는 은렬이다.
그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로 유명한 강세황(姜世晃)이 있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화에 열중하였고, 영조의 권유로 61세에 들어서 관직에 나가 병조참의와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그는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다. 그의 제자가 바로 김홍도이다.
그의 후손으로 강이오와 강이중은 혼천시계를 제작했으며, 강이오의 아들로 한성판윤을 지낸 강윤(姜潤)과 강건 형제는 휴대용 해시계(앙부일구)를 만들었다. 또한 그들 아들들도 앙부일구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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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의 초상 |
인헌공파는 삼한벽상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呂侯) 강궁진을 파조로 하고 있다. 강궁진은 고려를 건국할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강궁진의 아들이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임헌복시(任軒覆試) 갑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거란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전멸시겼다. 이에 후손들이 강감찬의 출생지인 금천을 따서 인헌공파를 ‘금천강씨’로 부르기도 한다.
인헌공파의 인물로는 조선 인조 때 우의정 세자부(世子傅)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가 있다. 그의 딸이 소현세자의 빈이 되는 민회빈 강씨이다. 소현세자가 독살을 당하고 그가 사약을 받게 되자 그의 아내와 친모, 4형제가 모두 사돈인 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들들 또한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생을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의사 강우규도 인헌공파의 후손이다.
이외 제주도에 정착한 강씨들이 많은데, 이들은 중앙정계의 부침으로 제주에 유배를 받은 강윤희(姜允熙·은열공파), 강인덕(姜仁德·은열공파), 강철(姜哲)의 후손이다. 그중 강철은 갑자사화로 재종형 강형(姜?)이 화를 입자,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어갔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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