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인문학’ 전도사로 통하는 최진석(54) 서강대 철학과 교수도 스티브 잡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최진석 교수는 “사회가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회로 진입하려면 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권력자 행세를 하는 ‘바람직함’이나 ‘해야 함’ 혹은 ‘좋음’ 대신에 자기가 바라는 내적 충동, 즉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카고대학은 인문고전 독서를 내용으로 하는 ‘시카고 플랜’을 시행하면서 노벨상 수상자를 대거 배출했다. 인문학이 상상력과 창의성의 공급원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미국의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에 경영학 관련 전공자는 3분의 1 정도밖에 되질 않아요. 대개는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대표적 투자자인 피터 린치나 조지 소로스 등은 철학 등 인문학에 심취하거나 전공한 사람입니다. 소로스는 아예 철학자 칼 포퍼의 제자였지요. 인문학 출신이라야 변화의 흐름에 부합하는 정확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는 이들도 놀랍게도 기업인들이다. 직감적인 감각이 매우 발달한 기업인들이 인문학의 가치를 빨리 알아챈 것이다.
“매번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기업인들은 늘 경계에 서서 민감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고도의 감각, 더듬이(통찰력)가 발달돼 있습니다. 기업이 인문학을 생존의 도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에 맞추어 가는 데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으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문적 통찰은 어떤 것인가. 최 교수는 정치적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그저 정치적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정치적 판단은 머릿속에 자기가 믿고 있던 신념·이념·가치관을 따라서 세계와 만나거나 혹은 그것을 근거로 세계를 해석하는 거예요. 무엇을 보고 나서 바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한다는 것은 인문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길들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최 교수는 인문적 통찰은 ‘조짐을 읽는 능력’이라 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한비자도 “성인은 아주 작은 현상을 보고 사태의 조짐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최종 결과를 안다”고 했다.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가 움직이면서 그려 내는 도도한 흐름과 방향이 있어요. 문명에도 문명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는 것이지요. 이 큰 흐름을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작은 일이나 현상들을 조짐이라고 합니다. 조짐으로 읽힐 만한 어떤 현상을 보고 ‘좋다’라거나 ‘나쁘다’라는 판단을 하는 것은 문명의 큰 흐름을 알아낼 가능성을 단절해 버리고 인식을 바로 거기에서 정지시켜 버립니다. 인문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대답하지 않아요.”
최 교수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인문학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5년, 10년 전만 해도 저런 일이 불가능했는데 이 세계에 무슨 변화가 있기에 저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인문적 통찰은 대답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데서 비로소 열립니다. 질문하는 활동에서 인문적 통찰은 시작됩니다. 선견지명의 빛은 자신에게 이미 있는 관념을 적용하는 데서 나오지 않고, 질문하는 곳에서 피어오릅니다. 모두가 대답하려고 할 때 외롭게 혼자서 질문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최 교수는 현대의 키워드로 개인의 욕망을 꼽는다. 현대를 연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니체도 근대적 이성을 부정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구체적 육체성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읽을 때, 근대가 이성에 악센트를 뒀다면, 현대는 동물에 악센트를 두고 있다.
“근대가 실체관이 지배한 사회라면 현대는 관계론의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렇지요. 노자나 장자도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관계성으로 돼 있다고 했지요. 현대정신과 상통하는 지점입니다.”
최 교수는 노자는 추상적 이상보다는 구체적 삶에, 체계적 이념보다는 개방적 소통에, 본질적 실체의 탐구보다는 비본질적 관계의 탐구로 나아가는 것에, 집단보다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에 방점을 뒀다고 말한다. 잡스가 세계와 관계하는 메커니즘을 한 개인의 손바닥 안에서 가능토록 한 스마트 폰의 발상도 노자의 인문학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가늠하게 해 줍니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별반 다른 게 아니에요. 인간의 동선이 어디로 움직일지 꿈꿔보는 능력이지요. 창의성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이 어디로 갈 것인지 꿈꿔 보고, 또 꿈꿔 보다가 그 나아가는 방향 바로 앞에 점을 찍고 우뚝 서 보는 것입니다.”
최 교수는 이미 자리하고 있는 이념이나 가치관, 신념을 벗고 오직 자신만 남길 것을 권한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이 그려가는 무늬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어떻게 그려질까 꿈을 꾸게 된다. 상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으로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지지요.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념가들이 선명성 경쟁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장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 교수는 요즘 EBS 인문학특강에서 명쾌한 노자 강의로 주목받고 있다. ‘인문의 숲’ 강의로도 유명한 그는 학생들에게 종종 반문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를 거닐었다. 활짝 핀 벚꽃이 바람에 꽃비를 날려도 그것을 즐길 왁자지껄한 청춘들이 없다. 아무리 중간고사 기간이라 하지만 오늘의 대학 현실을 가늠해 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박근혜정부가 야심 차게 새로 만든 ‘미래창조과학부’가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인문’이 빠져 있다는 최 교수는 안타까워했다. 미래·창조·과학이 인간의 동선(인문)에 대한 통찰 없이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임기자 wansi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