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가 잇따르면서 등장한 신조어다. 막말과 밀어내기 파문을 빚은 국내 최대 유가공업체인 남양유업이 9일 대국민 사과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남양유업 사태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슈퍼 갑’들의 음성적인 횡포는 금융·유통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산업 현장 곳곳에 독버섯처럼 기생하고 있다. 가해자들이 ‘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불감증도 한몫하고 있다. 뒤늦게 수습에 나선 정부와 정치권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갑을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경기침체가 수년째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꼭꼭 닫았는데도 A 화장품 회사의 매출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높은 품질과 경쟁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남양유업 사태에서 보듯 끊임없는 ‘물량 밀어내기’ 덕분이다. 작년에 제품 100개를 대리점에 내려보냈다면, 올해는 110개를, 내년에는 120개를 대리점에 내려 보낸다. 본사만 돈을 버는 구조 때문에 A사는 매년 10%씩 성장한다. A사 관계자는 “제품을 만들어 대리점에 내려보내면 본사의 일은 끝난다”며 “판매는 대리점 등에서 하기 때문에 본사와는 상관이 없다”고 귀띔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거래 회사 직원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홍보대행사 직원 이모(29)씨는 “고객이 자신의 대학원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조사를 시키고, 대필까지 요구하지만 ‘을’이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다수 홍보대행사가 영세한 점을 악용한 것이다.
보험설계사 박모(37)씨는 “점심 약속을 한 고객이 지인들을 불러 함께 밥을 먹고 식사 값을 떠넘기는 일이 종종 있다”며 “보험계약을 유지하려면 억지로라도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남양유업 파문이 확산되자 공정거래위원회·금융위원회 등 당국이 전방위 실태조사에 나섰지만 ‘뒷북행정’이라는 지적이다. 새 정부가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던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당리당략에 매몰된 나머지 갑의 횡포를 막아줄 최소한의 법적 장치로 불리는 ‘프랜차이즈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여야 원내대표가 6월 임시국회에서 우선처리 방침을 밝혔지만 ‘서민고통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갑을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상황에 따라 누구나 갑과 을이 될 수 있지만 80% 이상이 ‘을’이라고 생각할 만큼 본인이 갑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경쟁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결국 을로서의 억울함과 분노가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갑의 권력 남용과 횡포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손톱 밑 가시를 뽑는 것도 좋지만 사전에 가시가 박히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기환 기자 kkh@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