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무소 인근 한적한 공터에 세워진 1t 트럭 주변에는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수십명이 몰려들어 물건을 구입했다. 이들은 음식에 넣는 각종 향신료와 말린 생선, 쥐똥고추라 불리는 태국산 마른고추 등 식재료와 비누, 치약 등 생필품을 샀다.
슈퍼마켓 역시 동남아인들로 붐볐다. 외국인들은 김치, 단무지 같은 반찬 종류부터 라면, 음료, 맥주 등 다양한 물건을 바구니에 담았다. 점원이 계산기에 표시된 숫자를 보여주자 외국인들은 지갑과 허리에 찬 전대에서 돈을 꺼내 계산한 뒤 사라졌다. 점원은 “주민들보다는 외국인들이 구입해 가는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22일 오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한 인삼밭에서 태국 출신 쌩(44)이 인삼 줄기가 쓰러지지 않게 설치한 줄을 철사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
해발 400∼500m 고도에 형성된 이 분지마을은 전체 640가구 중 80%에 해당하는 515가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과거 무·배추 등 고랭지 채소와 감자, 고추, 콩이 대부분이었지만, 기후변화와 수익성 감소의 이유로 10여년 전부터 농민들은 인삼 농사로 갈아탔다. 현재는 개간한 땅까지 합쳐 이곳 농지의 40%가량이 인삼밭이다.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젊은 노동력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일손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현재 해안면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 인구는 전체 1442명 중 28%인 307명, 40∼50대가 36%(521명), 20∼30대는 20%(288명)에 불과하다. 일손 부족의 틈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메우고 있다. 대부분 태국인이고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출신도 있다. 이들의 80∼90%는 관광비자로 왔다가 눌러앉은 불법체류자들이다.
해안면사무소의 한 직원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정확한 집계는 안 되지만 대략 200명은 되는 것 같다. 농촌에 일손은 없지, 외국인들은 일자리가 필요하지….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법체류자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현근(48) 해안면 현3리 이장은 “과거 고랭지 채소를 재배할 때도 외부 인력을 많이 썼지만, 현재는 인건비가 싼 동남아나 중국계 외국인들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21일 오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사무소 인근 공터에 열린 ‘번개시장’에서 태국인 노동자들이 말린 생선 등 식재료와 비누 등 생필품을 고르고 있다. |
이튿날인 22일 오전 5시30분. 밤새 쥐 죽은 듯 조용했던 해안면이 새벽부터 북적댄다.
대형 트랙터부터 각종 농기계와 농약이 든 물탱크를 실은 트럭들이 왕복 2차선 도로를 오간다. 한 인력소개소 공터 앞에서는 승합차에서 내린 외국인 근로자 10여명이 트럭 뒤칸에 올라탄 뒤 인삼밭으로 떠났다. 이 작은 마을에 인력소개소가 4곳이나 있다.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를 농가에 연결시켜주고 있다. 인삼농사를 짓는 농가에서는 많게는 20여명씩 데려다 일을 하기 때문에 인력소개소를 통해 외국인을 구하지 못하면 농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해안면보건지소 인근 한 식당 주인은 “외국인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썼다면 대부분 불법체류자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2007년부터 약 16만5289㎡(약 5만평)의 밭에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 박창환(58·가명)씨는 5명의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 4∼5년을 함께 일해온 쌩(44), 고(43), 냉(33), 그리고 올해 3월에 새로 고용한 쑥(53)과 루이(38)다. 이들은 본명이 있지만 태국 발음이 어려운 데다 행여나 불법체류자로 신고될까 신분 노출을 꺼려 대부분 외자 가명을 쓰고 있다.
5년 가까이 일한 3명은 웬만큼 한국말도 알아듣는다. 인삼 줄기를 받치는 줄이 늘어지지 않게 철사로 고정하라는 박씨의 지시가 떨어지자 “네 사장님”을 외치며 얼른 밭두렁 사이로 뛰어갔다.
지난 22일 오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한 직업소개소 앞에서 인부 10여명이 인삼밭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타고 있다. |
박씨가 고용하고 있는 태국인들은 현지에서 공장에 다니다 돈 때문에 한국을 찾은 경우다. 지난해 기준 태국 공장노동자의 한달 평균 임금이 약 6420밧, 우리 돈으로 23만5000원 수준이다. 인삼밭에서 하루를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6만5000원, 나흘만 일해도 태국 월급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셈이다.
3월부터 11월까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주말 없이 일을 하면 한달에 200만원 정도 돈을 번다. 이들이 불법체류자 꼬리표를 달고, 몇년간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 남아있는 이유다.
농사는 월급이 아닌 일당 혹은 주당으로 현금을 받기 때문에 임금을 제때 못 받는 공장보다 인기가 좋다. 이곳에서 일하는 태국인들은 농장주가 내준 작은 방을 숙소로 사용한다. 불법체류자들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아예 인삼밭 인근 산속에 컨테이너를 놓고 숨어지내는 경우도 있다.
“태국에서 식당할 거예요.”, “나 태국 땅 삽니다.”, “베이비들 공부시켜요.”
돈 벌어 태국으로 돌아간 뒤 계획을 묻자 어눌한 한국말로 각자의 꿈들을 이야기한다. ‘코리안드림’을 찾아 이역만리를 넘어온 외국인들이 농촌을 지키고 있다.
양구=글·사진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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