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주 “신분확인 현실적 힘들어” 고객들도 서명 대충하기 일쑤
‘비밀번호 입력’ 등 개선 필요 의류매장을 운영하는 김모(47)씨는 얼마 전 한 카드사로부터 내용증명을 받았다. 몇 달 전 한 고객이 도난카드로 두 번에 걸쳐 80만원 정도를 결제한 게 문제였다. 카드사에서는 김씨가 신분증과 서명을 확인하지 않았다며 결제 대금의 50%를 책임지라고 통보했다. 김씨는 법률사무소 등을 찾아다니며 문의했지만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상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서명이 다르다고 물건을 팔지 않는 업주가 몇 명이나 되겠냐”고 토로했다.
도난이나 분실된 신용카드를 부정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본인 확인 용도로 쓰이는 서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카드를 쓰는 소비자는 물론 가맹점 업주들도 서명을 단순 절차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비밀번호 입력 등 다른 보안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여전법은 부정사용을 막기 위해 19조2항에 ‘신용카드 가맹점은 신용카드로 거래를 할 때마다 그 신용카드를 본인이 정당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카드 뒷면에 있는 서명과 매출표상 서명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50만원 이상 결제시 신분증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드사들은 도난·분실 카드가 사용됐을 때 이 법을 들어 가맹점에 30∼50%의 책임을 지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명 확인이 제대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 을지로 일대 식당과 의류매장 20여곳 중 카드 결제시 서명을 확인한다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권모(38·여)씨는 “서명을 대충하거나 카드 뒷면 서명과 다르다고 다시 해달라고 하면 손님들이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명 때문에 결제를 거부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소비자들도 서명에 무감각하다. 카드 뒷면에 서명을 하지 않았거나 평소 서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될 경우, 잃어버린 카드가 부정사용돼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카드 결제시 동그라미를 그리는 등 서명을 번거로운 절차로 여기는 분위기가 많다. 직장인 이모(33)씨는 “카드 결제할 때 공들여 서명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어차피 본인 확인 기능이 없는데 왜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많다”고 말했다.
가맹점 업주 등은 사고 발생시 서명으로 보상 여부 등을 결정하는 건 카드사가 돈을 강탈해가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카드사들은 소비자가 서명을 엉터리로 해놓고 분실했다고 거짓신고 하는 경우 등이 있기 때문에 가맹점에서 확인 작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카드 부정사용 민원이 늘어나면서 금감원은 지난 1일 분실·도난 카드 부정사용시 카드사의 책임과 보상에 관한 내용을 담은 모범규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미 사고가 벌어진 뒤 보상 부분에서 적용되는 제도여서 카드 부정사용을 줄이는 근본 대책은 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카드 결제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핀(PIN)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보우 단국대 경영대학원 신용카드학과 교수는 “사실상 서명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라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초기 시스템 구축 비용이 들더라도 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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