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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중국 유물로 보는 영욕의 역사

입력 : 2013-12-04 18:11:00 수정 : 2013-12-04 1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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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도 어렵고 지루하다는 마당에 외국의 역사를 책으로 공부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축적되고 발전한 것이라 우리의 시각과 기준으로 보면 이해조차 쉽지가 않다. 그래서 외국의 문화재를 모은 전시회가 유용하다. 역사의 한 국면을 증언하는 문화재는 보다 직접적으로 해당 국가의 역사를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국립고궁박물관이 내년 3월까지 여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전과 서울역사박물관이 내년 2월까지 개최하는 ‘북경 3000년, 수용과 포용의 여정’ 전은 유럽과 중국의 역사를 개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왕실문화를 통해 본 헝가리의 역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의 한쪽에는 어딘가 우수에 찬 눈빛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인 듯한 인상을 풍기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이 걸려 있다. 바로 옆에는 입꼬리가 올라가 살짝 미소를 지은 듯한 얼굴이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드레스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이 전시됐다. 둘은 부부로 19세기 말 헝가리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 크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요제프 1세 초상화.
헝가리는 1699년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정치·외교·군사 등의 모든 면에서 동반자로 인정받는 ‘대타협’을 이끌어 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 체제가 성립한 때가 요제프 1세 재위 당시인 1867년이다. 요제프 1세, 엘리자베트 여왕 부부의 불행은 세계적인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외아들이 자살하고 후계자로 책봉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토 대공이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요제프 1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해 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트 왕비는 절세의 미모로 헝가리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남편을 설득해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 이후 추모의 뜻으로 항상 검은 옷을 입었고, 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부채, 양산으로 가리고 다니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1898년 스위스에서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살해돼 생을 마감한다. 

엘리자베트 여왕 초상화.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실의 보물을 주제로 한 만큼 전시물은 화려함이 두드러진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헝가리의 독특한 문화가 조화돼 급격한 발전을 보이던 17∼19세기의 유물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성한 왕관’. 이슈트반 1세가 1000년에 교황으로부터 받았다는 전설이 깃든 왕관은 꼭대기의 십자가가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똑바로 세워져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어떻게 기울어졌는지는 모른다. 왕관을 주제로 여러 점의 판화와 부채가 전시됐다. 왕권과 민족주권의 상징인 왕관은 국회의사당에 보관돼 외부 반출이 안 되고, 전시된 것은 복제품이다. 진귀한 보석으로 꾸민 총, 칼과 갑옷 등의 무기도 화려하다. 손잡이와 칼집에 헝가리의 위대한 인물 초상들을 가득 새긴 칼이 눈길을 끈다. 남편의 엉덩이를 때리는 여자의 모습을 방아쇠울에 새긴 사냥용 총도 흥미롭다. 넝쿨의 잎과 꽃의 문양이 좌우대칭으로 도금된 황제의 의식용 갑주와 방패는 진중함이 돋보인다.

왕실의 상징인 왕관 등을 표현한 그림
◆다원화된 도시 ‘북경’


기원전 11세기 서주의 ‘연도(燕都)’이던 베이징은 3000년의 역사 속에서 ‘광양국’, ‘계성’, ‘유주’, ‘남경’, ‘중도’, ‘대도’, ‘경사’ 등으로 불렸다. 이름만큼이나 베이징의 지배세력은 다양했고, 전근대 동양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각 지역의 문화가 섞여들었다. 전시회는 포용성을 기반으로 발전한 베이징이 “오늘날 다원화된 문화체가 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금은제가면
북방의 거점 도시 역할을 하던 베이징이 중국 왕조의 도성으로 자리 잡은 것은 거란, 여진의 북방민족이 중국을 지배한 요·금나라 때였다. 요나라 때 배도(陪都·수도에 준하는 취급을 받던 도시)로서 남경이라 불렸고, 금나라의 해릉왕이 중도라 칭하면서 정식 도성이 됐다. 금은제 가면은 거란 귀족의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망자의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됐던 장례도구다. 대나무를 표현한 옥장신구는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잡아간 수많은 장인들의 솜씨로 추측된다. 

파초문양의 자기.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명나라에 이르면 서장(티베트) 불교가 통치자들에 의해 전파돼 베이징은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통치자들은 서장에 대한 통치와 관계 강화를 중시해 서장의 불교 예술은 나날이 번창했다. 금동 문수보살좌상 등 영락제 때 시작된 궁정의 불교조각상은 서장에서 전해진 성숙한 예술적 기반 위에 한족의 심미관이 접목된 예술 교류의 성과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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