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는 “영정사진을 가지러 집에 잠시 간 사이 장례식장에서 부른 A 의사가 ‘검안서를 써야 한다’며 전화했길래 결핵으로 7개월 넘게 입원하셨다가 요양원으로 옮긴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며 “그런데 장례식장에 돌아와 보니 시체검안서 사망 원인에 ‘뇌졸중·고혈압’이 적혀 있어 황당했다”고 말했다. 강씨 설명에도 A 의사는 강씨 형에게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쓰면 보건소에 신고도 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한데 노인들은 뇌졸중, 고혈압으로 쓰면 장례치르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며 이같이 검안서를 작성한 것이다. “유족 말을 무시한 데다 시신도 제대로 보지 않고 검안서를 썼다”는 게 유가족 주장이다. 강씨는 “의사는 시체를 봤다고 하는데, 의사가 병원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형이 내려가 만났는데 그 짧은 시간에, 보호자를 동행하지도 않은 채 시체를 봤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A 의사는 검안비로 현금 15만원을 받아갔다. 보통 대학병원이나 병원은 7만∼10만원 선이다. 강씨는 “장례식장에서 의원을 불러주고 검안비에서 수수료를 받는 것 같다”고 했다. 일부 장례식장과 검안의사 결탁설은 흔한 얘기다.
취재팀 확인 결과 80대인 A 의사가 운영하는 B 의원은 최근 2년 9개월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 진료비를 청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환자를 아예 보지 않았거나 비급여 진료만 했다는 뜻이다. 취재진 전화 문의에 A 의사는 “진료는 하지 않는다. 부르는 데나 나가고…”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아버지 장례를 치른 C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뜬금없이 빈소에 서류가방을 들고 온 70대 노인이 의사라며 명함을 건넸다. 그는 C씨 아버지 병력을 물어보며 “검안서에 (사인을)병사로 써주겠다”고 제안했다. 두 의사 모두 진료는 하지 않고 일대 장례식장을 순회 영업하며 마치 자판기처럼 검안서를 발급한다. 법의학계에서는 이런 이들을 ‘검안서 장수’라고 부른다.
시체검안서나 사망진단서는 의료기관을 개설해야 쓸 수 있다. 검안서 장수 역시 대부분 병·의원을 차려놓고 진료는 하지 않는다. 심평원에 진료비를 청구하지 않으니 관할 보건소 관리감독도 받지 않는다. 병원 간판조차 없는 곳도 있다. 취재팀이 찾아낸 서울 은평구 한 검안서 장사 의원의 경우 ‘진료과목 내과·외과·산부인과·비뇨기과’와 ‘포경수술’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병원명은 없었다. 심평원에 자료가 저장된 최근 5년간 진료비 청구내역도 전무했다.
이 같은 검안서 장수들은 국과수 부검의와 법의학자들 사이에서 ‘시체검안서의 나쁜 예’로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검안서와 사망진단서를 토대로 사망원인 통계를 내는 통계청에서도 큰 고민거리다.
한 법의학자는 “일부 의사가 사인을 ‘미상’으로 미리 써놓고 이름만 비어 있는 검안서를 들고 장례식장을 돌아다닌다”며 “경찰이나 유족 얘기는커녕 시신조차 안 보고 쓴 검안서는 엄밀히 따지면 허위진단서”라고 지적했다.
◆범죄에 악용되는 부실 검안서
의사가 시체검안서 발부만 하더라도 이는 전혀 위법이거나 부도덕하지 않다.
문제는 일부가 망자의 죽음을 검증하는 엄중한 작업을 건성으로 하고 사인을 엉터리로 기재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뿐 아니라 일반 의사 다수에게서도 엉터리 사망진단서와 검안서가 발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엉터리 검안서는 자칫 억울한 죽음을 그대로 덮어버리거나, 향후 유족이 보험금 송사 등에 휘말렸을 때 증거자료 구실도 하지 못한다.
취재 결과, 명백한 타살 흔적이 있는데도 의사가 병사 등으로 잘못 처리해 경찰에 신고되지도 않은 채 영원히 묻힐 뻔한 범죄 사례도 적지 않았다.
2012년 12월 경기도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83세 여성이 이미 숨이 끊긴 채 실려 왔다. 응급실 의사는 “어머니가 노환으로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말만 듣고 ‘직접사인-노쇠’, ‘사망의 종류-병사’로 기재해 검안서를 떼줬다. 병사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되지 않고, 검시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노인의 죽음은 자연사로 덮힐 뻔했지만, 입관 직전 아들에 의한 패륜사건으로 드러났다. 장례식장 직원이 시신 목에 걸쳐 있던 스카프를 풀자 끈에 졸린 선명한 자국이 나타났다. 직원 신고를 받은 경찰은 아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동두천 한 병원 응급실에 부엌칼이 등에 꽂힌 채 실려온 50대 남성 한모씨 사례도 비슷했다. 의사는 숨진 채 병원에 온 한씨에게 심폐소생술을 한 후 시신 등에 칼자국도 뚜렷한데도 사망 원인을 ‘심폐정지’, 사망의 종류를 ‘기타 및 불상’이라고 썼다.
이 밖에도 2010년 노숙 여성을 살해한 뒤 자신이 죽은 것처럼 꾸민 부산 ‘시신 없는 살인사건’ 등 타살사건을 검안의가 병사로 처리해 완전범죄가 될 뻔한 사례는 찾기 어렵지 않다. 완전범죄가 다수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법의학 서울의원 김형중 원장은 “아무리 법의학전문의가 아니라지만 검안하는 의사들이 시신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검안서를 쓰고 있다”며 “심폐정지는 죽음의 결과적 현상이지 직접원인이 아닌데도 사인에 심폐정지를 쓰거나 선행 사인을 알 수 없는 노쇠, 심장마비 등을 쓰는 오류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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