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설(薛, 偰)이라는 성을 쓰는 성씨가 둘이 있다. 하나는 맑은 대쭉 설(薛)을 쓰는 설씨이고, 다른 하나는 맑을 설(偰)을 쓰는 성씨이다. 앞의 설(薛)씨는 신라 6부족 중의 하나인 토종 성씨이며, 뒤의 설(偰)씨는 고려 때 넘어온 위구르 계통의 외래 성씨다. 설씨는 한국과 중국에 모두 있다. 하지만 그 계통과 연원은 각각 다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맑은 대쭉 설(薛)과 맑을 설(偰)을 쓰는 두 성씨가 있는데, 그중 맑은 대쭉 설(薛)씨는 제나라에서 나온 성씨로 알려져 있다. 다른 계통은 송나라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런 관계로 중국 남부 쪽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위의 효문제가 설씨로 성씨를 쓰기도 했으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은 고구려를 침입한 당나라 원정군 설인귀가 유명하다.
반면 맑을 설(偰)을 쓰는 성씨는 위구르 계통에서 나왔다. 즉 몽골과 러시아 국경을 지나는 설련하(偰輦河, 셀렝가 강) 지역에 살던 설연타부족이 자신의 성씨를 설(偰)씨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설(偰)씨도 이들의 후손으로 알려진 경주 설(偰)씨가 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설씨는 모두 경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설씨이다. 즉 이성동본(異性同本)의 성씨이다.
먼저 경주 설(薛)씨 계통은 경주, 순창 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데, 이들은 신라를 세운 6부족 중의 하나에서 생겨나왔다. 이들의 시조는 신라 건국 설화의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촌장 호진(虎珍)이다. 신라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 때 6촌이 6부로 개칭하고,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로 고칠 때 성을 설(薛)씨로 하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설씨에서는 원효대사, 그리고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난 설총이 유명하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2명의 설(薛)씨가 나온다. 2대 유리명왕 때 설지(薛支)라는 인물이 나오고, 태조왕 때 설유(薛儒)라는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경주 설씨, 또는 다른 설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외 같은 본관을 쓰는 경주 설(偰)씨의 시조는 위구르 계통에서 나온 성씨로 원나라 태부인 설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을 시조로 삼고 있다.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귀화하고 경주를 본관으로 하사받으면서 경주 설(偰)씨가 시작되었다. 이들 경주 설(偰)씨의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름 설(卨), 문설주 설(楔)을 쓰기도 하는데, 다 같은 계통이다.
입덕문 경주설씨의 시조인 고야촌장 호진을 비롯하여 신라를 건국한 6촌장의 위패를 모신 경주 양산재 내 입덕문. |
경주 설씨의 시조는 신라건국 6부족의 하나인 명활산 고야촌의 촌장 호진(虎珍)이다. 명활산은 지금의 경북 월성군 천북면 일대를 말하는데, 신라 3대 유리 이사금(서기 32년) 때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었다. 이때 촌장이었던 호진도 설(薛)씨 성을 하사받고, 설거백(薛居伯)으로 바꿨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하지만 신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므로, 설씨 성을 쓰게 된 것은 설거백의 14세손인 설곡(薛嚳)으로 추정된다. 즉 ‘설씨이천년사(薛氏二千年史)’에도 “최초의 본관을 14세 곡(嚳)이 경주로 삼았는데 신라 진흥왕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름 앞에 태어난 부족이나 지명을 사용하였을 뿐 본관을 따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관을 정했다기보다는 성씨를 정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삼국사기 열전 편에 신라 26대 진평왕 때의 아버지 대신 군에 간 가실을 기다린 ‘설씨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신라에서 성을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설씨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고려 인종 때, 시조의 36세 설자승(薛子升)이 예부시랑으로 순화백(淳化伯, 순창)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설귀창(薛貴昌)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경주 본관으로 그대로 썼다. 그 외에도 밀양, 순천, 옥천, 진주, 창원을 본관으로 하는 설(薛)씨가 있다고 하나 파악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이들이 모두 경주 설씨에서 분적되었기 때문에 경주 설씨 또는 순창 설씨로 합본하여 계대를 파악하고 있다.
경주(순창) 설씨는 현재 8파(派)로 나누어져 있는데, 시조의 39세 설신(薛愼)의 두 아들인 설공검(薛公儉)과 설인검(薛仁儉)에서 문양공파(文良公派)와 문숙공파(文肅公派)가 나뉘어졌고, 문양공파는 다시 44세 설응(薛凝)과 설풍(薛馮) 대에서 암곡공파(巖谷公派)와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뉘어졌다. 암곡공파는 다시 45세 설훈(薛燻)과 설위(薛緯), 설즙(薛緝) 3형제에서 증옥천군파(贈玉川君派)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나뉘어지고, 증옥천군파는 46세 설효조(薛孝祖), 설계조(薛繼祖), 설영조(薛榮祖), 설순조(薛順祖) 4형제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 옥천군파(玉川君派), 군수공파(郡守公派), 삼지당공파(三知堂公派)로 나눠졌다.
경주(순창)설씨는 조선시대 문과 3명, 무과 2명, 사마시 8명, 율과 1명 등의 인재를 배출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설씨 인구는 3만8766명인데(2000년 국세조사), 이 중 위구르 계통의 경주 설(偰)씨 3000여명을 제외한 3만5000여명이 경주(순창) 설(薛)씨로 파악되고 있다.
분황사 원효대사 영정 원효대사는 유불을 통합한 불교사상을 정립하여 의상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으로 칭송받고 있다. |
신라를 건국한 6부족 중의 하나인 설씨(薛氏)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설사(薛思)와 설총(薛聰)이다. 설사(원효대사)는 진평왕, 무열왕 때 인물로 각종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아찬이었던 설이금(薛伊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고, 만삭이 된 몸으로 압량군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娑羅樹)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낳았다고 한다. 그 후 불문에 들어가 신라 문무왕 1년에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하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 크게 깨닫고 유불을 결합한 불교사상을 펼쳤다.
그가 문무왕 딸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 설총(薛聰)은 학문에 뛰어났으며, 한자를 차음한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문장(三文章)’으로 일컬어졌다. 벼슬은 한림을 지냈고 왕의 자문역할을 했으며, 후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었다.
그 외 신라시대 경주 설씨의 인물로는 대사도(大司徒) 벼슬을 지낸 설심조(薛沁祚), 시중랑을 지낸 설균지(薛均之), 설이순(薛履舜), 문장사(文章事)의 설문결(薛文結), 진평왕 때 당나라에 건너가 전공을 세우고 대장군에 추증된 설계두 등이 있다. 위작 여부가 논란인 화랑세기에는 어머니 성을 따른 설원랑 등이 나오나 증명할 길이 없다.
설총의 묘 경주에 있는 설총의 묘. 최초의 우리글인 ’이두’를 창안한 그는 강수, 최치원 등과 함께 신라의 3문장 중의 하나이며, ‘동국18현’ 중의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
설신의 아들 설공검(薛公儉)은 고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낭중이 되었다. 원종 때 군기감으로 원나라에 가는 세자를 호종한 공으로 우부승선이 되었다. 충렬왕 때 좌승지가 되었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감찰대부와 지첨의부사를 역임하였다. 죽은 뒤 충렬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평장사를 지낸 설공검의 아우 설인검(薛仁儉)과 설공검의 아들로 충렬왕 때 정승을 지낸 설지충(薛之沖)도 이름을 날렸다. 충선왕 때의 명의였던 설경성(薛景成)은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던 집안 출신으로 상약의좌(尙藥醫佐)가 되었다. 그 후 동지밀직사사와 첨의사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충렬왕의 병을 고쳐 최고의 명의라는 찬사를 들었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와 성종의 중병을 고쳐,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떨쳤다.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문 뒤, 고려에 돌아와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36세손 설자승(薛子升)은 인종 때 예부시랑으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다. 그 후 순창에서 설씨가 세를 떨치면서 순창 설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공민왕 때 참지문하성사를 지낸 설응(薛凝)은 고려가 기울자 두문칠십이현의 하나로 순창에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설칭(薛偁)은 태종 때 경주부윤과 직제학을 지냈고, 설위(薛緯)는 세종 때 대사성에 올랐다. 특히 설위는 청렴 정직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백정시(栢亭詩)를 남겼고, 청백리에 기록되었다. 세조 때 안무사를 지낸 설효조(薛孝祖)는 아들인 담양부사 설성(薛成)과 함께 좌익원종공신에 올랐다. 또, 그의 동생으로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여 정난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진 설계조(薛繼祖), 상주목사로 역시 좌익공신에 추대된 설순조(薛順祖)가 문중을 빛낸 인물들이다.
그 외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던 신말주의 부인으로 권선문을 써서 여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설씨 부인도 있다.
순창 설씨 대종회 순창 설씨는 경주 설씨에서 분적한 본관으로 대동보를 합본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
설진영(薛鎭永)은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아미산 남쪽에 은거하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재계 인물인 설경동(薛卿東)은 대한그룹의 모체인 대한산업을 설립, 대한방직을 창업했다. 이를 토대로 대한전선, 대한제당 등을 세웠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한국증권협회 회장, 대한방직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들인 설원식(대한방직그룹회장), 설원량(대한전선그룹회장), 설원봉(대한제당사장) 등이 있다.
그 외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장 설의식, 문학가 설정식 형제, 전북도교육감을 지내고 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설인수, 경남일보 사장을 역임한 설창수, 세계일보 사장을 지낸 설용수(경주순창설씨대종회장)도 경주(순창) 설씨 후손이다.
그 밖에 정재계에 국회의원 설훈, 설봉희(황해도 도지사), 설동훈(부장검사, 변호사), 설경진(검사, 변호사), 설경훈(미국주재 한국총영사관), 설국환(대한여행사회장), 설홍열(한일리스회장, 서울증권사장), 설상일(우리금융대표), 설정선(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 설권석(전남 농촌진흥원장), 설균태(전북신용보증재단 초대 이사장), 설재연(예비역준장)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설동근(동명대총장), 설동호(대전광역시 교육감), 설봉식(중앙대 경영대학장), 설중환(고려대 인문대학장), 설정현(영남대 의무부총장), 설동훈(전북대교수), 설성경(연세대교수), 축구선수 설기현, 영화배우 설경구 등이 있다.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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