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자리가 꿈 지키는 ‘참호’ 기억하길 스물한 살, 처음 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해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첫해엔 멋모르고 하고, 두 번째 해부터는 이게 평생 나의 길이다, 하는 각오로 응모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선된다면 새해 아침 신문에 다른 기사 하나 섞이지 않고 내 작품과 이제 작가로 첫 출발을 하는 내 사진, 당선소감, 심사평, 이것만으로 신문 2면을 가득 채운다.
당선자에겐 이보다 더 크고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시 경우에는 수천 편 가운데 한 편이고, 소설은 수백 편 가운데 한 편이 그해의 영광을 안는다. 신춘문예는 보통 11월 10일을 전후해 신문마다 ‘미래의 한국문학을 이끌 새 작가를 찾습니다’ 하는 응모공고가 나간다. 그리고 마감은 보통 12월 10일 전후이다.
응모가 끝나면 신문사마다 1차 예심을 거치고,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을 가지고 최종심사를 해 늦어도 12월 24일 전에는 당선자 통보를 한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24일까지 신문사로부터 통보를 받지 못했다면, 그해 자신이 응모한 작품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문학수업을 10년간 했다는 것은 그걸 내가 10년간 겪었다는 뜻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꽤 오래전부터 신춘문예 심사를 봐 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시기가 되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서늘함을 느끼곤 한다. 이제 신춘문예 응모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성작가로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 입장인데도 그렇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자꾸 나의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문에 신춘문예 공고가 나면 이제까지 쓴 작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원고지를 한 박스 사놓고 한 작품 한 작품 그것을 새로 옮겨 쓴다. 지금은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컴퓨터로 출력을 하지만 그때는 한 글자 한 글자 원고지 위에 썼던 것이다. 중간에 틀리게 쓴 글자가 있으면 혹시 그게 나쁘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그 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옮겨 썼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옮겨 쓴 작품들을 누런 사각봉투 안에 신문사별로 하나씩 넣고(물론 봉투 안에 든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작품이다.) 직접 신문사에 내러 간다. 지하철 시청 앞에서 내려 이 신문사, 저 신문사로 10년간이나 매년 되풀이했던 그 순례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20대가 가장 꽃 같다고 하는데, 나는 신춘문예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10년간이나 계속된 낙선의 절망 때문에 10대나 30대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20대로는 선뜻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다. 돌아간다면 다시 그때처럼 글쓰는 일에 매달리겠지만, 그때의 절망이 내게는 너무 사무치기 때문이다. 이때가 되면 잊었다가도 꼭 한번 다시 읽어보는 짧은 글이 있다.
이순원 소설가 |
책이 실패하면 출판사는 문을 닫고 직원들은 실직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헤밍웨이를 지켜줄 명망 있는 사람의 서문이 필요했다. ‘노인과 바다’의 교정쇄를 읽어보고 바로 나선 사람이 작가 제임스 미치너이다. ‘헤밍웨이는 최고이다. 그의 작품이라면 내가 써주겠다’고 나섰고, 책이 나왔으며 책은 미국 대륙을 휩쓸고 유럽을 휩쓸었으며 결국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제임스 미치너가 ‘노인과 바다’의 교정쇄를 처음으로 읽어본 곳은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어느 산골, 멀리 포성이 들리는 참호 안이었다.”
지난날 나처럼 낙선에 절망해 낙담하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올려준 글인데, 글을 쓰는 자에겐 저마다 책상을 놓고 앉은 자리가 바로 참호가 아니겠는가. 아니, 문학뿐 아니라 우리가 저마다 일하고 있는 자리가 바로 자기의 현재를 지키고, 미래의 꿈과 이상과 희망을 지키는 참호가 아니겠는가. 이땅의 문학청년들 모두 기운내시라.
이순원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