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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에 꽃한송이] 일당스님을 기리며

입력 : 2014-12-30 21:07:08 수정 : 2014-12-30 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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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채화가로 독보적… 불교미술사에 큰 획
어머니 그리워하며 고독속에 산 스님
소년같은 해맑은 미소 다시 볼 수 없으니…
지난 25일 93세를 일기로 입적한 일당 스님(속명 김태신·사진)은 어머니 김일엽 스님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화승(畵僧)의 삶을 살다갔다.

일당 스님은 1922년 일제강점기 유학파 출신 문인이었던 일엽 스님(1896∼1971)이 출가 전 일본 도쿄에서 명문가 자제인 오다 세이조(太田正雄)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세이조 자신도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인텔리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두 사람의 혼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들을 일본에 남기고 귀국한 일엽은 수덕사로 출가했고, 훗날 한국불교 최고의 여승이 된다.

일당 스님의 고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모친을 만나러 수덕사 견성암을 찾아가면서 심화됐다. 이집 저집 양자 생활을 하면서도 오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견뎌냈건만, 이미 속가의 인연을 지워버린 일엽은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며 아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고 하산한 일당 스님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어머니 친구인 나혜석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이후의 삶은 방황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양아버지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워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스님은 그림만이 큰 위안이 됐다. 그는 고야산불교대학에서도 불교미술을 전공해 불교적 세계관과 자연을 합일시키며, 석채화가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다.

일본에서 이름 있는 화가로 활동하던 일당 스님은 1972년 한국에 귀화하면서 일본이름 오다 마사오를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 김태신이라는 한국이름을 갖는다. 1987년 66세 나이에 그 역시 출가해 스님이 됐고, 한국불교미륵종 제5대 종정을 지냈다.

화승이 된 일당은 기(氣) 있는 산을 찾아다니며 산 풍경을 많이 그렸다. 설악산, 월출산, 황산, 후지산…. 그가 그리는 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다. 모든 산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린 아들을 보고 미소 짓는 어머니,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머니. 산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김옥기 수필가, 전 미국 스페이스월드 관장
필자가 기획자와 작가로 일당을 만난 지도 십수 년이 넘었다. 뉴욕에서 몇 차례 일당 스님의 불화 전시회를 열어드렸고, 가끔 그의 그림여행에 동행하면서 스님이나 화가 이전 인간 김태신의 고독한 가슴앓이를 느꼈지만, 그가 예술로 승화시킨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을 엿보며 감동에 젖기도 했다. 8년 전 중국 황산에 갔을 때인데, 85세의 노인이 20년도 더 젊은 나보다 훨씬 산을 잘 타서 나도 모르게 오기로 황산에 오른 기억이 새롭다. 그 뒤 백두산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은 그에게 어머니 스님이 있는 정원이었을 터, “어머니는 내 영혼의 안식처였고,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소망이었다”는 일당의 고백이 귀에 쟁쟁하다.

일당 스님의 유골은 어머니 일엽 스님이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했으며, 자신이 최근까지 기거하며 작품을 했던 성북동 성라암 뒷산에 뿌려졌다. 만년 소년 같은 그 해맑은 미소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김옥기 수필가, 전 미국 스페이스월드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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