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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붙들지 못한 남자… 그가 선물한 뇌과학의 진보

입력 : 2015-01-09 21:41:11 수정 : 2015-01-09 2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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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억제 위해 27세 때 뇌 절제술
‘해마’ 손상돼 30초 前 일도 기억못해
수잰 코긴 지음/이민아 옮김/알마/1만9800원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수잰 코긴 지음/이민아 옮김/알마/1만9800원


2004년 개봉한 미국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는 수의사 헨리(애덤 샌들러)가 하와이에서 우연히 만난 루시(드루 베리모어)한테 한눈에 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헨리가 ‘작업’에 공들이고 루시도 어느 정도 호응해 분위기는 썩 괜찮았다. 하지만 이튿날 루시는 헨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루시에게 ‘치한’ 같은 취급을 받은 헨리는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알고 보니 루시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전날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2004)의 한 장면. 기억상실증 탓에 어제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사연을 로맨틱 코미디로 그려냈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 벌어졌다. 책 제목에 ‘HM’이라고 표기된 미국인 헨리 몰레이슨(1926∼2008)이 주인공이다. 어려서 심한 뇌전증(간질)을 앓았던 헨리 몰레이슨은 27세 되던 1953년 뇌 수술을 받았다. “뇌 조직 일부를 절개하면 간질 발작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유를 수락한 결과였다. 지금은 엄격히 금지됐지만, 1950년대는 뇌전증 환자를 상대로 뇌 절제 수술을 곧잘 시행했다.

“뇌 조직을 제거하면 헨리의 간질이 치료될까? 헨리가 기억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고, 그날 헨리의 인생은 송두리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기억 형성 능력을 잃은 헨리 몰레이슨은 1960년대부터 미국 뇌학자들의 연구에 자기자신을 기꺼이 ‘실험 도구’로 제공했다.
알마 제공
의사가 절개한 뇌 부위는 ‘해마(海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1953년 당시 의학은 사람의 뇌에서 기억 형성 능력을 관장하는 부위가 해마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헨리 몰레이슨의 사례를 통해 해마 손상이 기억상실증을 야기한다는 게 비로소 확인됐다. 한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한 의료사고가 역설적으로 뇌과학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수술 후 헨리 몰레이슨은 더 이상 기억을 쌓을 수 없었다. 어제 누굴 만났는지, 점심에 뭘 먹었는지, 심지어 30초 전에 옆사람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마치 양 손에 퍼담은 시냇물이 손가락 틈새로 금세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다고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1953년 수술 이전에 알게 된 사람과 학교에서 배운 내용 등은 거의 정확히 기억했다. 지능, 감각, 운동 등 뇌의 다른 기능은 모두 정상이었다.

사람 뇌의 해마는 기억 형성 기능을 관장하는 곳이다. 헨리 몰레이슨은 1953년 뇌 절제 수술로 해마의 대부분을 잃었고, 이후 더 이상 기억을 쌓지 못했다.
알마 제공
책은 미국 뇌과학자들이 헨리 몰레이슨을 상대로 실시한 각종 연구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비록 그는 끔찍한 의료사고 피해자였으나, 100여명의 과학자가 뇌를 주제로 진행한 연구에 자기자신을 기꺼이 ‘시험 도구’로 제공했다. 저자도 헨리 몰레이슨을 꾸준히 관찰한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학습’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HM을 통해 밝혀졌다. 그는 뇌과학 역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가장 유명하고도 중요한 환자가 되었다. HM은 1970년대 이후 뇌과학과 심리학 교과서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되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머리글자로만 알려졌던 그의 이름은 2008년 사망 후에야 비로소 공개됐다.”

헨리 몰레이슨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 기억을 쌓을 수 없는 그는 미움과 분노 같은 감정도 모두 잃고 늘 밝은 태도로 살았다.
알마 제공
기억을 만들 수 없는 헨리 몰레이슨의 삶은 과연 불행하기만 했을까. 저자는 “헨리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좀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헨리 몰레이슨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저자는 “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나 때로는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며 “부끄러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처참한 실패 등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이 무거운 쇠사슬이 되어 우리를 칭칭 동여맨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기억이 없기에 뒤끝도, 미움도, 분노도 없었던 헨리 몰레이슨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도서출판 알마 배은희 과장은 “드라마틱한 비극을 겪으면서도 상냥하고 헌신적이었던 헨리의 면면에 편집 도중 잠시 펜을 놓곤 했다”며 “‘휴먼스토리를 바탕으로 뇌과학을 개관하는 책’으로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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