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최초 토착민 출신 대통령 올라
에너지 산업 수익 국민에 돌려주고
정치 이해 다른 지역도 차별 않고 포용
방문한 교황도 “코카 씹고싶다” 부탁
볼리비아인 명예·?
스벤 하르텐 지음/문선유 옮김/예지/2만3000원 |
남미의 작은 나라 볼리비아는 10여년 전만 해도 그저 그런 가난한 나라였다. 나라 살림살이는 늘 어려웠고 최고 2만4000%의 초인플레이션으로 국민 생활은 피폐했다. 미국의 원조에 기댄 정치엘리트들은 석유와 가스 등 국가 재산을 다국적기업에 팔아넘기고 이권을 챙겼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은 시민운동이었다.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사회주의운동당(MAS)이 주체였고, 에보 모랄레스(55) 대통령은 선두에 선 인물이다. 그는 2005년 남미 국가 최초의 토착민 출신 대통령에 당선됐다.
신간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는 평범한 시민운동이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작동하게 된 과정을 조명한다. 강경 좌파 성향의 모랄레스정권이 어떻게 사회통합에 성공해 남미의 기적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모랄레스가 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건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 원료로 쓰이는 코카 때문이다. 볼리비아에서 코카는 ‘성스러운 잎’이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1000여년 동안 코카를 재배했고 지금도 800여만명이 매일 코카를 소비한다. 코카 잎은 차, 식재료, 의약품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 닉슨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볼리비아에는 재앙이 닥쳤다.
미국은 볼리비아를 페루와 함께 코카 재배지로, 콜롬비아를 코카인의 제조·공급지로 낙인 찍었다. 당시 볼리비아 집권 세력은 미국의 압력과 정치적 후원에 회유되어 코카 근절 정책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 코카 재배자들은 졸지에 ‘마약 제조의 공범’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다. 볼리비아 정치 엘리트들은 미국의 후원이란 단맛에 빠져 이권을 챙기는 데 급급했고 볼리비아 민생은 파탄에 빠졌다.
참다못한 코카 재배자들은 MAS를 결성해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모랄레스가 선봉에 섰다. 애초 모랄레스는 코카 재배자 조합인 신디카토(sindicato) 직원으로 일했다. 신디카토는 며칠이고 토론을 벌이며 중지를 모아 행동에 나섰다. 모랄레스는 이 과정에서 뛰어난 언변과 신중한 행동으로 신망을 얻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토론을 통해 중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모랄레스는 통합의 기술도 체득했다. 시민들은 물과 가스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맞섰다. MAS가 중심이 된 시민운동은 다양한 분노와 열망을 지닌 시민단체의 중심이 되는 데 성공했다. 2005년 대선에 MAS 후보로 출마한 모랄레스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2014년 3선에 성공했다.
모랄레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다수 국민에 혜택을 주는 정책으로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냈다. 에너지산업 국유화로 생긴 이익금을 소득재분배로 국민에게 돌려줬고, 철저한 가격 관리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했다. ‘에보노믹스’로 불리는 경제정책으로 빈곤층이 줄고 실업률이 떨어지면서 모랄레스는 장기 집권 발판을 마련했다. 석유와 가스 등의 국유화 조치는 다국적기업과 부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모랄레스는 굴하지 않았다. 2006년 114억달러였던 볼리비아 국내총생산(GDP)은 2013년 306억달러로 배 이상 확대됐다. 1인당 GDP는 1203달러에서 2868달러로 늘었다. 2006년 4.8%였던 경제성장률은 2013년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6.8%를 기록했다.
모랄레스의 성공은 베네수엘라의 좌파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비교된다. 차베스가 이끌었던 베네수엘라는 아직 경제 침체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남미 포퓰리즘 정부인 아르헨티나 역시 채무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은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 당시 그를 ‘제2의 차베스’로 간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 이 책의 저자는 ‘책임 있는 포퓰리즘’을 모랄레스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모랄레스는 정치적 이해가 다른 지역을 차별하지 않았다.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주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볼리비아 경제의 30%가량을 차지하는 경제 중심지다. 모랄레스에 대한 불복종 및 분리독립 운동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그러나 모랄레스는 이 지역의 기업활동을 보호했고 각종 인프라를 확충시켜 가장 혜택받은 지역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8일(현지시간)부터 볼리비아를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지 정부 관계자에게 “코카를 씹고 싶으니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외신들은 “이는 무척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코카를 씹는 것은 볼리이바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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