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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 60년 외길… 문학의 제국주의 식민사관 탈피 선구자

입력 : 2015-10-26 21:35:16 수정 : 2015-10-26 21: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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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저서 특별전’ 여는 문학평론가 김윤식 ‘읽다 그리고 쓰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팔순을 기념해 제자들이 한국현대문학관에서 기획한 ‘김윤식 저서 특별전’(12월11일까지) 제목이다. 그의 삶을 평가하는 다른 수사를 찾기는 힘들다. 김윤식은 읽고 쓰는 외길을 수도승처럼 걸어왔다. 1962년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된 이래 지금까지 내놓은 저서만 200권이 넘는다. 본인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 목록을 찾아 완성해 놓은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는 의미가 깊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정년을 마쳤고, 한국의 근대에 대한 실증적 탐색을 문학과 연계시킨 공이 크다. 그는 이광수, 임화, 염상섭 등 근대 극복 의지를 문학에 내장한 이들의 텍스트 안팎을 샅샅이 파헤쳐 한국문학이 제국주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현장비평에도 개입해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작가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 월평이라는 형식으로 40여년째 지금도 현역으로 기고하고 있다. 읽고 쓰는 삶의 여일한 여정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시대가 그대 소년들에게 명한다. 선진 제국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식민사관이 과연 과학적·학문적으로 성립하는가 아닌가를 증명하라. 만일 성립된다면 도리 없다. 새 나라를 만들 필요도 없고, 전처럼 남의 종살이를 열심히 하면 된다.’(‘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필경(筆耕), 말 그대로 글로 쓰는 농사를 60년 가까이 지어 팔순에 이른 문학평론가 김윤식. 그는 “지금까지 나는 내 글은 한 번도 쓰지 않고 전부 남에 대해서 글을 쓰고 가르치는 삶을 탕진해 왔다”면서 “창작이 자기 기질이 못 된다는 걸 아는 것은 위대한 비평가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식민사관의 요체는 말 그대로 조선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근대화할 능력이 없었으니 식민 지배를 고마워하라는 이야기다. 과연 그러한가. 경제학 분야에서 이미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연구가 있었고, 북한에서는 금광 같은 자원으로 인해 표나게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움튼 사례가 먼저 증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이 식민사관을 극복해온 과정은 오로지 연구자들의 몫이었던 셈이다. 이 역할을 수행한 선구적인 연구자가 김윤식이었다. 그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필두로 임화, 염상섭, 이상 등 일제강점기 걸출한 작가들을 탐색해 밀도 높은 연구서들을 펴냈다.

“윤달에 태어났어요. 그것도 낮 12시. 그러니까 내 생일은 19년 만에 돌아와요.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진영 산골짜기. 거기서 10리 길 초등학교 다니며 개근을 했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 큰 누님은 시집 가고 없었고 둘째 누나가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동네에서도 한참 떨어진 강변 버드나무집에서 벗이라야 까치나 까마귀 메뚜기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에 먼저 들어간 둘째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교과서를 펼치면 거기에 못 보던 여러 가지가 다 들어 있어요. 안 자고 옆에서 그 책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저 세계로 가고 싶다 생각했지. 엄한 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고는 아무 소리도 안 했어요. 마산상고를 다녔는데 졸업 무렵에 아버지가 너 돈벌이해서 뭐하겠느냐면서 교장선생이 되라고 해요. 서울 가서 교원양성소에 들어갔는데 그게 서울대 사범대학인 겁니다. 글을 쓰면서 가르치는 일을 병행할 예정으로 그 학교에 들어갔는데 순경음이니, 반치음이니 가르치고 글 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아 군대로 가버렸어요. 군대에서 돌아오니 친구들도 사라지고 갈 데가 없어 문리대 도서관에서 살다가 신용하(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패들과 의기 투합했어요.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각 분야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할 학술적 논거를 찾아 달려간 겁니다.”

김윤식의 개인사는 알려진 부분이 미미해 처음부터 작정하고 성장기와 문학에 입문한 배경을 물었더니 그는 짧고 간명하게 말하고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현대문학관 응접실에 함께 나온, 결혼 50년째 접어든 그의 아내 가정혜씨가 “저이는 원래 그래요!”라고 남편을 해명한다. 아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윤식의 단답형과 자신만의 세상에서 홀로 꿈꾸는 듯한 그의 대사와 문장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었다. 

“근대는 사실 200년 정도밖에 안 돼요. 우주에서 보면 한순간에 불과하지요. 지금 사회에서 근대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은 포스트 근대 아녜요? 너희들이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근대를 외쳐댔지만 요새는 어떤 시대인지 아느냐고 묻겠지요. 그럼 우린 허깨비였느냐? 맞습니다. 그렇게 묻는 너희들도 조금 있으면 허깨비가 될 운명입니다.”

그는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철학자 칼 포퍼(1902~1994)의 말을 덧붙였다. 포퍼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가짜가 될 가능성을 그 속에 갖고 있을 동안만 진리”라고 설파했다. 진짜는 가짜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동안만 진리라는 말인데, 작금의 진리는 깨어지기 전까지만 진리라는 언설이다. 그렇다고 허무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주어진 당대의 소명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만이 영원한 현재진행형 진리를 따르는 셈이다.

김윤식은 실증적 연구작업과 더불어 지금까지도 40여년째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현역 비평가이다. 그는 ‘문학사상’에 오랫동안 월평을 연재해 왔다. 다양한 문예지에 막 발표된 단편소설들을 끈질기게 읽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평을 붙이는 데서 기쁨을 찾아왔다. 그는 “작품과 작가를 구별하여 이 작가는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골짜기의 물을 마셨는가를 문제 삼지 않고 오직 작품만 보고 그 속에서 시대의 감수성을 얻고자 했다”고 최근 출간한 ‘내가 읽은 우리 소설’ 서문에 썼다.

“작품을 통해서 현실을 내가 배우는 겁니다. 현실에서는 배울 능력이 없고 복잡하니까. 그리하여 얻은 이 시대의 감수성은 다양합니다. 이전에는 이데올로기니 분단 같은 준거들이 있었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같은 거룩한 사명이 있었는데 요즘은 전혀 다릅니다. 사르트르는 애비가 세 살 때 죽고 누나 같은 어머니와 살았지요. 그는 나는 자유다, 자유 때문에 꼼짝 못하겠다고 외쳤는데, 오늘날 작가들 감수성이라는 게 전부 그렇습니다.”

김윤식 슬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나와 한국문단을 종횡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저그들이 다 잘나서 그렇다”면서 “내가 사기친 책들로 배운 사람들은 많을 것”이라고 답했다. 후학이나 작가들에게 주고 싶은 말을 재우쳐 묻자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되 위기에 처했을 때 머리보다 가슴이 판단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후회하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래도 덜 후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 신경숙 표절 파문으로 빚어진 참담한 한국문학의 그늘에 대한 견해를 묻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선문답을 이었다.

“이 세상에 머리 숙일 데는 두 군데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늘, 또 하나는 여러분을 낳아준 부모. 이 외에는 머리 숙일 데가 절대 없어요. 머리 꼿꼿하게 세워 가지고 살아요. 머리 숙일 데가 어디 있어?”

1962년 문학평론 데뷔 소감에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고 썼던 김윤식은 노년에 이르러 서울대 고별강연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가 있어서 한국문학도 다행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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