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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을 넘어서… 현대 수묵화, 길을 묻다

입력 : 2015-11-04 03:28:12 수정 : 2015-11-04 03: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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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展·당대 수묵展 현대 수묵화가 정체된 원인은 뭘까. 많은 작가들이 수묵화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했지만 성과는 별반 신통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일군의 작가들의 끊임없는 실험정신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이들은 동양의 보편적인 화론이나 미학을 추상화하고 절대시한 것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추상화나 절대화는 모두 하나의 고정된 원형이나 본질을 상정하고,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나왔다거나 혹은 모든 것이 그곳으로 되돌아간다고 여긴다. 언뜻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 같은 연역과 귀납은 하나의 본질을 상정한 환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환원주의적 시각은 예술창작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논리적 억압이거나 해석적 폭력일 수 있다.

기운생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김호득의 ‘꿈속의 구룡폭포’.
어쩌면 우리가 돌아가야만 하는 ‘도(道)’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끊임없이 만물을 낳고, 해와 달이 오래되었어도 그 빛은 매일 새로우며, 세상에 책이 많으나 담고 있는 뜻은 저마다 다르다”고 했다. 장자는 절대적인 도는 미리 존재해서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꾸역꾸역 걸어가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흔적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와 세상이 하나이고, 함께 변화해 가고,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간다. 이 같은 고민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일획의 필선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서세옥의 ‘두 사람’.
내년 3월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서세옥(86)전은 작가가 기증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시기별 대표작 100점을 소개하는 자리다. 1960년대 묵림회를 통해 추구했던 수묵추상 작품들과 197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생동감 넘치는 묵선과 여백의 공명만으로 인간형상 속 기운생동을 표현했던 ‘사람들’ 시리즈 등을 볼 수 있다. 작가는 평생 수묵추상을 통해 ‘모든 가능에로의 탈출’을 모색해 왔다.

“나는 가시적인 대상의 노예 노릇은 하지 않는다. 절대의 큰 바다에는 형태가 없다. 나는 때때로 대상을 초월하여 무극(無極)의 저 공간에서 찾고 있다. 거기에는 절대 해방과 절대 자유가 있다. 인간은 유한하다. 때문에 영원을 동경한다. 있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 뒤따르고 없으면 반드시 있는 것이 뒤따른다. 이것이 바퀴처럼 영원히 돌고 도는 무극의 참모습이다. 이를 통찰할 때 우리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웨이칭지의 ‘파라마운트산을 점령하라’.
그는 절대의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듣는 것이 관음(觀音)이요, 절대의 향내를 코로 느끼지 않고 귀로 느껴야 하는 것이 문향(聞香)의 경지라고 했다. 이것이 화가가 알아야 할 초월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실상(實相)과 허상(虛相)이 조화를 이루면 모두가 정토(淨土)가 아니던가. 여기에 나의 붓끝이 닿으면 춤과 노래가 흥겹게 어우러질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과정을 “가로 세로 붓을 떨어뜨리니 바람과 우레소리 일어난다. 홀로 서릿발 같은 붓을 잡고 마귀의 진을 무찔러서 열어가는데, 만약에 진짜 용이나 호랑이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어찌 우주의 참기운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라고 시로 읊기도 했다.

반야심경을 형상화한 조환의 ‘무제’.
학고재 갤러리에서 29일까지 열리는 ‘당대 수묵전’도 한국과 중국 작가들의 새로운 모색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김선두, 김호득, 조환 등 한국작가 3인과 웨이칭지(魏靑吉), 장위(張羽) 등 중국 작가 2인이 출품했다. 우리 땅의 황토색 짙은 서정풍경과 하늘을 수묵채색으로 담아내는 김선두 작가는 장지 위에 채색을 수십번 중첩하여 아래의 색이 덧칠한 색을 통해 발색하게 만든다. 무한한 색을 담고 있는 검정(墨有五彩)을 새롭게 해석한 작가는 수묵을 붓으로 그린 다음 그 필선을 가위로 오려내고 여백을 채색 장지로 콜라주한다. 아래 색이 필선의 색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타공된 쇠판의 텅 빈 공간을 먹선으로 삼는 ‘철묵화’까지 밀고 나갔다.

김호득 작가는 종이를 구겨서 먹을 찍어내거나, 한지에 먹을 적시고 주물러 빚어놓기도 한다. 한지와 같은 전통재료에서 벗어나 질기고 성긴 광목천, 캔버스천 등을 이용하여 먹이 스미는 공간을 다양하게 연출하고 있다. 폭포, 계곡, 바위, 그리고 흐르는 물을 주로 그렸던 작가는 수많은 점 찍기와 선 그리기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화폭을 만들어냈다. 종이 죽을 꽉 쥐어짜 내거나, 수조에 먹물을 담고 그 위에 시간의 흔적이 담긴 광목천을 거는 설치작업도 선보였다. 먹으로 기운생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찍어 그린 장위의 ‘지인(指印)’.
조환 작가는 서예를 바탕으로 한 설치작업을 보여준다. 철판을 자르고 용접해 전통 산수와 서예의 획을 현대의 산물인 철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전시장 벽면에 세워진 철판엔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장욱(張旭)이 쓴 반야심경 구절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그 앞엔 배가 있다. 불교 설화에서 등장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를 갈 때 타는 배다. 참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 타고 건너가는 교통수단이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근본에 이르고자 대상의 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본질은 가시적인 현상으로부터 해방됨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웨이칭지의 화폭엔 별로 가득 찬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 스포츠 상표 퓨마 로고, 할리우드 이미지, 공산당의 상징인 낫과 쇠망치, 도시의 고층빌딩과 같은 이미지들이 얼굴을 내민다. 그에게 수묵전통은 오늘에도 연구가능한 형태라야만 의미가 있다. 연필과 금박과 같은 비(非)수묵 재료들을 과감히 수용하고 먹을 떨어뜨리고 번지게 하는 등 새로운 기법도 시도한다. 그는 “전통은 정신적인 흐름으로 변화와 개선의 과정에서 휴머니티를 보장하는 것은 계속 확인되어야 한다”며 전통의 현대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했다.

장위는 붓과 먹 대신 손과 매니큐어로 화폭을 만들어 간다. 손가락에 물과 매니큐어를 발라 화폭에 찍어 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이른바 지인(指印)화다. 전통적으로는 승낙과 계약을 상징하는 지장을 통해 새로운 수묵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지두화(指頭畵)와는 달리 지문의 원본 형태가 잘 보이도록 먹 대신에 물과 매니큐어를 사용한다. 전통재료인 장지에 국한하지 않고 유리판을 캔버스로 삼기도 한다. 수없이 찍어 가는 지인작업 속에서 작가는 우주의 광활함,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 정신세계에 이르게 된다.

수묵화의 색다른 진화들이다. 이 같은 수묵화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 시대 새로운 화론을 만들어갈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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